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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군을 너무 믿어서 갈 수 없는 거예요."
"내 핑계를 대고 피하지 마. 선배는 지금 그 안에 있는 것 때문에 가기 싫은 거잖아?"
"그래서 안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아니, 선배는 지금 피하고 있어."
"…기분 탓이에요. 제가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츠무기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나츠메는 시선을 츠무기에게서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장소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겠지만 선배가 생각하는 그 곳이 맞다고. 그 말에 츠무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곳인 걸 알면서도 자기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나츠메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했건만 나츠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데. 그 위험부담을 굳이 안고가야 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고 투덜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나츠메는 츠무기의 멱살을 잡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닥치고 따라와."
"…어째서 매번 그렇게 강압적인 거예요?"
"선배는 어째서 매번 그렇게 도망가는데, 그러면?"
"그러니까, 도망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피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츠메는 츠무기의 멱살을 놓고는 내일 오후엔 출발할 거니까 알아서 잘 생각해보라고 하고는 깊이 잠든 소라를 방으로 옮겼다. 나츠메가 소라를 편하게 재우는 사이 츠무기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는 나츠메를 걱정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인주신사(人住神社)가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 곳은 어떤 마을과도 교류가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마을의 이름을 카쿠레자토(隠れ里-저세상, 혹은 돌아오지 못하는 곳)라고 칭했다. 카쿠레자토는 주변 마을에서조차 그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으며, 길을 잃은 아이가 흘러들어오면 그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카미카쿠시(神隠)의 마을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오바 츠무기는 그 마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이니까.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그 마을에서 데리고 나와 사카사키 집안에 맡기기 전까지, 그는 그 곳에서 앞으로의 마을을 짊어질 기둥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삶을 추억해 보면 그렇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게 말렸으니까. 심지어 숨을 쉬는 것 조차도 언젠가는 허락을 받아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정말이지. 나츠메 군과 있으면 싫은 기억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츠무기는 소파에 드러누워버렸다. 불을 끈 뒤에 드문드문 빛나는 야광별의 조각들이 마치 흩어진 자신의 조각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스티커는 사카사키 가문에 얹혀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붙인 것이었다. 나츠메는 어릴 때부터 영감이 강한 아이였고, 그래서 자신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반쪽을 꺼리게 된 것이라고 츠무기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나왔을 때 츠무기의 절반은 이미 요괴화가 된 상태였다. 아마 성인이 되면 완전히 요괴가 되어 그 마을 지하 깊은 곳에 봉인이 될 터였다. 그것이 아오바 가문의 남자들의 의무였다.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결국은 그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그를 데리고 도망쳐나왔다. 마을은 완전히 뒤집혔고, 추적자가 따라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츠무기의 어머니가 그 마을 최고의 무녀였다는 사실이었다. 추적을 뿌리치고 뿌리친 끝에 다다른 곳은 이상하게 다른 곳과는 동떨어진 곳에 지어진 제법 그럴듯한 양옥이었다. 그 주변으로 강한 결계가 쳐있는 것을 느낀 츠무기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달려가 그 집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곳에서 나온 건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강한 느낌의 여성과 그녀를 많이 닮은 여자아이였다. 그 여자아이가 사실은 남자아이였다는 건,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때의 나츠메 양은 좀 더 수줍음이 많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말이죠...."
"일 말고도 다른 걸 생각할 시간이 있다니, 아주 여유가 넘치네, 선배?"
"나, 나나, 나츠메 군?! 잠든 것 아니었나요?"
"소라만 재우고 나왔어."
"...그럼 인기척 좀 내주세요."
"선배가 자는 줄 알았거든."
그렇게 말하고 부엌의 작은 등을 켠 나츠메는 따뜻한 차를 우려서 츠무기에게 한 잔을 건넸다. 테이블에 와서 잔을 받아들고 맞은편에 앉은 츠무기는 가만히 따뜻한 잔을 손에 쥔 채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 뗐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서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냐는 츠무기의 질문에 나츠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츠메는 자기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좀처럼 알려주지 않아서 조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하고 잔을 내려놓은 나츠메는 그의 고향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거절하지 않았느냐는 츠무기의 원망 섞인 질책에 나츠메는 한숨을 내쉬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언제까지 도망만 갈 수는 없잖아. 그 녀석을 떼어내든지, 그 녀석과 융합하든지. 선택할 때라고 생각 안 해?"
"...하지만 이건."
"원해서 생긴 힘도 아니고, 마음대로 제어를 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나츠메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지나치게 어린 시절에 도망쳐나온 것 때문에 츠무기 안의 요기는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고심 끝에 그 안의 요기를 봉인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반동의 여파로 쓰러졌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츠메는 그 요기때문에 몇 번인가 크게 다칠 뻔했고,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츠무기의 혼을 분리해내면서 일시적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분리된 혼 중 인간의 부분이 함께 있으면 제어를 하기 쉽도록 츠무기와 나츠메에게 각종 주술을 가르쳐 준 것도 그녀였다. 특히 나츠메에게는 외부에서 츠무기의 혼을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주술들을 알려주었고, 나츠메는 재능이 있어서인지 그 주술들을 무리없이 습득해갔다. 그 사이에 한참 츠무기를 찾는 데에 총력을 다했던 카구레자토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지도에도 없던 마을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계속 이어지니 사람들이 집중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 어딘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주술을 연마하다가 텐쇼인 회장의 눈에 들었고, 그렇게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회사를 떠나 왔지만. 여기까지 생각하던 츠무기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아까부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츠메를 마주보았다.
"왜 갑자기 카쿠레자토가 다시 나타난 걸까요?"
"뭐, 이제는 실체가 없는 소문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늘기도 했고...."
"...그리고요?"
"인주신사의 새 제물이 필요해졌을지도 모르지."
"...새 제물...인가요?"
"선배가 그 마을을 나온 지 얼마나 됐지?"
"...제가 일곱 살 때니까, 적어도 십 년은 됐네요...."
"그 전의 제물이 목숨을 다했대도 이상하지 않을 때잖아?"
"...그러네요."
"인간 제물의 무시무시한 독기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아오바 집안의 남자들 뿐인 것 같고 말이야."
뭐,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지만. 담담하게 말하며 나츠메는 마지막 남은 차를 비우고 잔을 가볍게 씻어서 뒤집어 놓으면서 츠무기에게 물었다. 지금 그 마을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에 츠무기는 마음 한 구석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자기를 데리고 나온 것은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텐데. 자기는 그저 제 안의 요기가 폭주할 것이 두렵고 그로 인해 나츠메마저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츠메가 따라준 차를 다 마시고 잔을 씻어두면서 츠무기는 가만히 심호흡을 하고는 나츠메에게 내일, 자기도 함께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츠메는 후회해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곤 자기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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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귀여운 막내씨~, 뭘 하고 있나요?]
피코피코. 연달아서 울리는 메시지 수신음에 나츠메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버렸다. 마치 그런 행동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소파에 핸드폰이 닿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결국 나츠메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핸드폰 너머에서는 경쾌한 목소리가 서운함을 담은 채 우리 사이에 어떻게 대답도 안할 수 있냐는 등의 말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나츠메는 한쪽 귀를 막은 채, 혼자 떠들기만 할 거라면 이만 끊겠다고 투덜거렸다. 그제야 상대방은 미안하다며 부탁할 게 있어서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안즈를 통하지 않은 연락은 꽤나 오랜만이라, 나츠메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이어폰을 연결하고는 소파에 누워 용건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게 말이지요, 마을 하나가 통째로 결계에 잡혀있는 것 같답니다~.]
"그런 얘기라면 결계사를 부르는 게 빠르잖아? 왜 언령사를 찾는 거야?"
[우후후후, 유감스럽게도 우리 결계사들 중엔 나츠메 군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없어서 말이지요!]
"회사는 인재가 너무 부족하네, 정말이지."
[그래서 말인데요~, 나츠메 군. 다시 돌아와주지 않겠습니까?]
"끊는다."
냉랭한 나츠메의 반응에 상대는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고 하며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결계사가 아니라 언령사인 나츠메를 찾은 건 지금까지 결계사들은 그 마을을 그대로 [통과]해버렸기 때문이란다. 그 마을이 있다는 걸 인식을 한 상태에서도 풀리지 않는, 아니, 풀 수 없는 결계라는 말에 나츠메는 흥미가 동하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반응을 잡아낸 히비키는 씨익 웃으면서 정식으로 의뢰를 하고 싶다고 운을 띄웠다. 나츠메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자긴 비싸다고 했지만, 히비키는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에게 부탁할 심산인 히비키의 말에 나츠메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뭐, 이번 건은 의뢰를 받아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인가요? 어떤 거죠?]
"형이 찍은 내 사진. 당장 지워."
[에에에에?! 어째서죠? 이제는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랑스러운 막내의 사진인데!]
"그 막내의 '여장'사진이겠지. 지울 거야?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아."
[흑흑, 어쩔 수 없네요. 형아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사진이었는데에...훌쩍훌쩍.]
"스승님."
나츠메가 딱딱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스승님, 이라고 말하자 히비키는 질색하면서 사진을 지울테니 호칭을 고쳐달라고 했다. 나츠메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히비키의 애원에 겨우겨우 형이라고 호칭을 고쳐주고서야 제대로 의뢰를 받았다. 나츠메의 메일로 조사보고서를 보낸 히비키는 그 마을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는 보고를 받은 건 한 달 전이라고 했다. 그 뒤로 회사에서는 꽤 여러 명을 파견한 모양이지만, 누구도 마을 안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마을 입구가 보이는가 싶으면 짙은 안개가 끼어 목적지를 잃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 마을을 통과해버린다고 한다. 어떻게든 입구까지 도달한 결계사들은 있었지만, 그 결계를 풀지는 못했다고 했다. 위치는 큐슈의 옛 유적지 근처 마을이라나. 그 말을 들은 나츠메는 낮게 콧소리를 내며 지도를 뒤적거렸다. 위성지도로는 혹시나 무언가 보일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 시도는 허탕만 쳤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네. 나츠메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히비키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끊긴 전화를 보던 나츠메는 한숨을 내쉬고 소라와 츠무기에게 연락을 했다.
[네~. 무슨 일이에요, 나츠메 군?]
"선배, 장 다 봤으면 들어와. 되도록 빨리."
[에에? 방금 계산을 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일하러 가야해."
[지금부터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지."
[우우, 저는 '감옥'에서 나온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녜요?]
불평이 조금 묻어나는 츠무기의 목소리에 그러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든가, 라고 말한 나츠메는 그건 싫다며 바로 들어오겠다는 츠무기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꽤 먼 곳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소라의 부적 덕분인 걸까? 비명소리와 함께 10분도 안되어 도착한 두 사람은 나츠메가 있는 소파에 늘어졌다. 제 위로 실린 무게에 짜증을 내며 두 사람을 밀어낸-그래도 소라는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내지 못해, 소라는 겨우 누워있던 나츠메의 옆으로 옮겨앉은 정도였다. - 나츠메는 장을 본 것을 정리하면서 얘기를 들으라고 하곤 이번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츠메에게 밀려나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쓰고 물건을 차곡차곡 채워넣던 츠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이번 마을은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는 거네요."
"반대로 말하자면 '나올 수 없는 마을'인 거지."
"그 마을 사람들도 참 안됐어요.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요?"
"글쎄. 하지만 어떤 결계도 완벽하진 않아. 게다가 마을 하나를 통째로 감쌀 정도라면 말이지."
"으음, 그렇겠네요. 어딘가에는 틈이 있을 거예요."
"정 안되면 선배 안의 「그 녀석」으로 태클이라도 걸면 결계가 흔들리겠지."
"에엑?! 농담이죠, 나츠메 군? 아무리 저라도 결계의 종류에 따라선 타버린다고요?!"
"아, 그것도 괜찮겠네. 타버리면 잘 묻어줄게."
저를 향해 가볍게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는 나츠메의 건성인 태도를 보며 츠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저 아이는 나만 보면 못살게 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츠무기는 마지막 물건을 냉장고에 넣고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몸이 된 것도 아닌데. 아까 나츠메의 말에 순간적으로 올라온 살의를 내리누르느라 에너지를 쏟아 조금 지친 채로 저녁을 준비하던 츠무기는 나츠메에게 이번 의뢰 장소를 물었다. 나츠메는 제 옆에서 얘기를 듣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소라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다가 큐슈의 시골 마을이라고 답했다. 큐슈의 시골 마을... 츠무기의 인상은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나츠메는 그런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마을 중심에 인주(人柱)사당이 있는 곳이지."
"...그 곳에 절 데려가겠다고요? 진심이에요?"
"내가 선배를 제어 못 할거라고 생각해?"
나츠메의 말에 츠무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츠메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내서라도, 자신을 제어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진짜로 두려운 것은 일관적으로 그런 태도를 고수할 것이 분명한 나츠메였지만, 그는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인주사당이 있는 큐슈의 마을이라니. 까닥 재수가 없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곳을 굳이 스스로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츠무기는 자기는 이번 일에는 함께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츠메는 그 말에 잠시 손을 움직여 소라를 조금 더 깊이 재워놓고는 츠무기를 빤히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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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카사키 나츠메입니다."
"하루카와 소라네~, 잘 부탁해요!"
"아직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인데도 히비키 이사님의 추천을 받을 정도의 실력이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뭐, 대략적인 얘기는 보고서로 받긴 했습니다만, 최초로 사건이 일어난 교실은 어디죠?"
기대라. 좋을대로 말하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나츠메는 일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교장은 두 사람이 오늘부터 지낼 교실이라며, 내선전화로 담임교사를 불렀다. 문을 열고 담임교사가 들어온 순간, 나츠메는 이 학교에는 죄다 저런 교사들 밖에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한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교사는 얇은 테의 안경을 살짝 올려쓰고는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자기가 담임인 쿠누기 아키오미라고 말했다. 교장부터 담임까지 하나같이 깐깐해보이는 인상에 나츠메는 속으로 꽤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을 안내해주라는 교장의 말에 쿠누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데리고 교실로 향했다. 어쩐지 숨막히는 공기가 계속되는 복도를 지나면서, 쿠누기는 두 사람에게 작은 책자를 하나 주었다. 그 책자에는 학교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으며, '학생규칙'이라고 제목이 적혀있었다. 그 말인 즉슨, 이 책자에 있는 내용이 전부 오우카스미레의 교칙이라는 것이다. 소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사이, 쿠누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둘을 쳐다보며 일단은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야 할 테니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다. 소라는 자신이 없는지 교실로 가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츠메는 그런 소라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교실은 무척이나 조용해서, 문이 열려도 들리는 소리는 펜이나 연필로 필기를 하는 소리 정도였다. 쿠누기가 교단에 서는 것과 동시에 그 소리는 일시적으로 끊겼다. 그리고 반장으로 추정되는 학생이 일어나서 일어나, 차렷, 경례라고 구호를 붙이자 학생들은 일제히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평안하셨습니까. 경직된 분위기 안에서 우러나온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는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쿠누기는 평안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받은 뒤에 나츠메와 소라를 전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교탁에서 받은 아이들의 시선에 소라는 겁을 먹었는지 슬쩍 나츠메의 손을 잡았다. 나츠메는 그런 소라의 손등을 가만히 토닥여주고는 태연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마쳤다. 하지만 생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반 아이들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에 조금 더 가까웠다. 일년이나 이런 학교에 있다보면 그렇게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선생님이 지정한 자리로 걸어가던 나츠메는 그 멍한 시선들 가운데 유난히 맹렬하게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도대체 누구지 싶어서 고개를 돌리던 그는, 진한 캐러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녹색 눈과 마주쳤다. 다른 아이들이 거부감과 의문을 표시하는 것에 반해, 그 소녀는 호기심을 만면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모두가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코쿠리상을 불러낸 것도 이런 일부의 아이들이었던 걸까?
"나츠메~라고 불러도 돼?"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잖아? 마음대로 하렴."
"앗, 고마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로 찾아온 그 캐러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자기를 에리나라고 하면서 옆에서 이것저것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가끔씩 꽂히긴 했지만 에리나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곧잘 얘기를 하는 만큼 호기심도 많은 건지, 그녀는 금세 나츠메와 소라에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개인정보를 그다지 넘기고 싶지는 않았던 나츠메가 슬쩍 말을 돌리며 피해가는 걸 눈치챈 에리나가 그에게 불만을 토로할 즈음,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다가와 에리나의 머리에 가볍게 손칼로 촙을 먹였다. 에리나는 그녀에게 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고, 그녀는 시원하게 웃으면서 나츠메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저 바보가 귀찮게 한 것은 대신 사과하겠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미나미로, 에리나와는 소꿉친구라고 했다.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 자기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미나미의 뒤로는 엄청난 시선이 느껴졌다. 질투, 라는 말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시선들에 나츠메는 사흘 안에 일을 끝내고 이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에게 웃음으로 답했다.
수업시간은 정적의 연속이었다. 입학할 때부터 스파르타 식으로 가르치고 못 올라가는 학생들은 따로 관리한다더니,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도 이미 일반 고등학생의 수준을 초월한 것이었다. 소라는 이미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열이 난다며 보건실로 가버렸고, 나츠메는 그런 그에게 이 틈에 식신을 써서 주변을 둘러보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계속해서 수업을 들었다. 어려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더러 눈에 보였지만 교사는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전원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는 모양새에 나츠메는 의문을 품었다. 매년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 오우카스미레인데,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따라올 수 있는 녀석들만 따라오라는 교사들의 태도였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잠이나 독서로 보냈다. 더러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점심시간에 들을 수 있었다. 전학생에게 살갑게 다가온 에리나와 미나미는 그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부분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 이어폰은 학교에서 특별히 지급한 전용 이어폰으로, 특수한 파장이 나와 뇌를 자극한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실력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말에 나츠메는 혀를 내둘렀다.
"공부 기계라도 찍어내려는 모양이네, 이 학교는."
"알고서 전학온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이사 온 집에서 가까워서 온 건데."
"그럼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우리 반은 조금 덜 한거야."
"...뭐?"
이미 충분히 숨막혔는데, 이게 덜 한거라고? 기가 막히다는 나츠메의 표정을 본 두 사람은 풋, 하고 웃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흔들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학교는 실력별로 A반부터 E반까지 클래스를 나눠서 관리하고 있고, 그 중에서 A반은 특별진학반이라 교사들의 관심과 관리가 어마어마하며, 그 아래로는 알파벳이 낮아질수록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자유로운 것은 E반이냐고 묻자, 두 사람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건 오히려 D반일 것이라고 했다. E반은 학교에 적응을 못하거나 대형사고를 쳤거나 해서 다음 시험 성적에 따라 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인 아이들이 모여있어서 A반과는 다른 긴장감이 감돈다고 했다. 매년 자살하는 사람도 대부분 E반에서 나온다는 에리나의 말에 미나미는 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비밀인 건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던 나츠메는 자기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두 사람을 보고는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있지, 이 학교에는 7대 불가사의라던가 하는 것 없어? 있으면 알려줬으면 하는데.]
"7대 불가사의? 그거라면 신문부에 자료가 있을거야. 에리나는 신문부니까, 방과 후에 안내해줄게!"
"고마워, 에리나."
"천만에! 그것 말고도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학교 신문은 정기적으로 발행해야 하니까 가십거리라면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거든!"
자기 가슴을 툭, 치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에리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 나츠메는 두 사람에게 오후 수업에 대한 안내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중간중간 복도에서 떠들지 말라며 잔소리를 하려던 교사들도 나츠메를 보더니 전학생을 안내해주고 있으니 이번만 특별히 봐주겠다며 다시 길을 가곤 했다. 복도에서조차 큰 소리는 안 되는 건가. 정말 숨막히네. 혀를 슬쩍 빼물어 답답함을 표시하던 나츠메의 눈에 복도 끝에 나무판자가 덧대어있고 그 위에 낡은 부적이 붙은 문이 보였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인 채 나츠메가 움직일 줄을 모르자 먼저 가던 두 사람이 의문을 표하며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말에 복도 끝을 가리키며 저기에는 무엇이 있냐고 묻자 에리나와 미나미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으로 나츠메의 손가락을 내리고는 잰 걸음으로 교실로 향하며 그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저기는 옛날에 반성실이었대."
"반성실...?"
"응, 그런데 요즘은 반성실도 다른 곳으로 옮겼거든. 그래서 폐쇄된거야."
"흐응.... 그렇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은밀하게 말하는 거야?"
"저긴 공식적으로 학교에는 없는 곳이거든."
공식적으로는 없는 곳이라는 말에 나츠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쓰였다는 얘기겠지. 우선 저곳부터 조사해보도록 할까. 그렇게 결심한 나츠메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자리로 돌아온 소라에게 아까 봤던 '반성실'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그곳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소라는 호호~하는 소리를 내며 나츠메의 말을 유심히 듣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고 쿠누기에게 불려가 기숙사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생각보다 낡은 양옥에 마른 침을 삼켰다. 두 사람의 방을 알려준 쿠누기는 짐을 풀려는 나츠메에게 뭔가 단서를 잡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츠메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생각보다 학교가 넓어서 아직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학교의 체벌제도에 대해 물었다. 안경을 가볍게 올려쓴 쿠누기는 그걸 왜 궁금해하느냐고 하면서도 현재 남아있는 건 반성문을 쓰는 것과 반성실에서 자기 태도에 대해 돌아보는 것뿐이며, 나머지는 벌점제도로 대체되었다고 답했다. 작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나츠메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고 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아 쿠누기를 보았다.
"이 학교에는 집단괴롭힘이 있나요?"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방금 질문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나요?"
"그럼요. 학교에선 의외로 어떤 일이든 생기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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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뢰는 분명히 한 번 거절했을텐데."
"하지만, 이제는 부탁할 사람이 나츠메 군 뿐이야!"
"말은 잘 하지. 너희들이 맡긴 골칫거리를 지금까지 내가 몇 개나 해결했다고 생각해?"
"그, 그건...."
"다시 한 번 말할게. 다른 사람을 알아봐."
나츠메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녀는 급하게 손을 뻗어서 나츠메의 손을 잡았지만, 그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갈색머리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는 그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페 안의 시선이 그와 그녀에게 쏠렸지만 나츠메는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소녀 또한 물러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우리를 좀 도와줘!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자 사람들은 저마다 나츠메에게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런 사람들을 곁눈질로 보던 나츠메는 작게 혀를 차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동시다발적으로 켜지던 카메라 화면이 갑자기 먹통이 되었다. 당황한 사람들을 둘러본 나츠메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무슨 구경이라도 났어? 각자 하던 일들이나 하지 그래?]
나츠메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돌리고는 일을 하던 사람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종업원들은 서빙을 이어갔으며,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이 아이는 보통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는 손을 뻗어 나츠메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나츠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숙여 소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는 소녀에게 손가락을 세 개 펴보인 그는 이 정도의 대가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다고 전하라고 하고는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떠나버렸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별다른 소득이 없이 돌아갔다. 이대로 가면 또 한소리 들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힘없는 걸음으로 자신을 보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소녀는 상사에게 나츠메가 세 장을 달라고 했다고 말하며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그를 보았다.
"저어...꼭 나츠메 군이어야 해요?"
"몇번이나 말했잖나. 그 정도의 실력이 아니면 죽어."
"하지만 거절당한 상대한테 밀어붙이는 것도 힘들다고요? 게다가 대가도 비싸고."
"돈은 회사 차원에서 지급한다. 너는 그가 의뢰를 받아들이게만 하면 돼."
"이번엔 세 장이라고 했다고요. 과연 사장님이 그걸 허락해줄까요?"
"흠, 확실히 그건 조금 과한 요구로군. 다른 회유책이 있으면 좋을텐데."
"이번에 잡을 요괴를 그에게 준다는 건요?"
"그게 될 리가 없잖나!"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사카사키 나츠메에게 이 이상 힘을 실어주는 게 싫은거죠?"
"조용히 해!"
정곡이었네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작게 혀를 찼다. 사람이란 어쩜 이렇게도 이기적일까. 그도 이런 회사의 성질을 알고 있기에 계속 거절하는 거겠지. 애초에 회사의 말을 들을 이유도 그에게는 없기도 하고. '회사'라는 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있던 퇴마사들을 한곳에 모아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공유하고, 혼자서 하기 힘든 일들을 함께 해결할 동업자를 찾는 것이 목적인 곳이다. 6년여 전에 퇴마사들이 종파나 주술에 관계없이 대거 살해당한 교토대사변 이후에 조금 더 원활한 대처를 하기 위해 생긴 곳인데, 회사를 세운 텐쇼인 가문이 워낙 수완이 좋아서 순식간에 대기업을 뺨치는 규모로 확장되었고, 지금은 정부에서 암암리에 의뢰를 맡기기도 하는 곳이다. 아까 소녀가 만난 사카사키 나츠메는 원래 회사에 속해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는 자기를 잘 따르던 후배 하나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이후로 그는 후배와 둘이 민간 퇴마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평범한 학교 생활을 구가하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오라고 몇 번인가 사람이 찾아간 적도 있지만, 그들은 번번이 거절을 당하기만 했다. '학교 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나츠메가 내세운 이유였지만, 소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번번이 이유를 물어보려면 말을 돌리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피하는 통에 단 한번도 그 이유를 들은 적은 없다.
"일단 나는 사장님께 보고를 하고 오지. 안즈, 너는 그동안 적절한 회유책을 생각해봐라."
"...네."
자신의 사무실을 나서서 사장실로 향하는 상사의 뒷모습을 본 안즈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러니까 그냥 잡는 녀석을 그에게 주면 가장 빠르게 끝날텐데. 어차피 나츠메가 비싼 가격을 부른 것도 정말로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것은 아닐것이다. 이번에 회사가 퇴치를 의뢰한 녀석은 사람의 정신에 들러붙어 그를 조종하는 부정의 요괴로, 그를 빙의체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요괴의 힘보다 강한 언령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회사의 언령사들은 이미 몇 번이나 실패했고, 그 요괴를 떼어내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언령사들 중에서 빙의체를 거의 아무 상처없이 떼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츠메 뿐이므로 해결을 위해 몇 번이나 그에게 접촉을 했었지만 나츠메는 얘기를 듣기도 전에 싫다고 했으며, 얘기를 듣고서도 싫다고 답했다. 회사를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닌데도 그는 이번 일을 유난히 꺼려하기는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사장실에서 돌아온 안즈의 상사는 유백색의 종이 파일을 안즈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장님이 그거라면 그도 더이상은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
"...이건?"
"이번 의뢰를 성공하면 그를 해방해준다. 의뢰비는 지급하지 않아. 사장님의 말로는 사카사키 나츠메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조건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회사에서 감금해두고 있지 않나요? 분명히 위험인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가. 너는 들어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
안즈의 의문에 상사는 그의 안경을 고쳐쓰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 차라리 독자적으로 조사할 걸. 조금 길어질 것같은 이야기의 서두에 속으로 작게 혀를 찬 안즈였지만, 이미 열린 입을 막을 수는 없기에-심지어 그랬다간 이야기가 아니라 장시간의 설교를 듣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릴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의 남자는 아오바 츠무기라는 인물로, 사카사키 나츠메가 회사에 있을때 함께 나갔던 하루카와 소라를 제외하고 상당히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인물 파일을 보던 안즈는 의문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츠무기의 프로파일을 읽었다. 아오바 츠무기의 이름 옆에는 반으로 나뉘어 오른쪽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프로파일을 정독하던 안즈를 보던 상사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눈치챘군. 아오바 츠무기는 절반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럼, 아오바 씨가 갇혀있는 이유는 혹시...."
"너도 조금은 공부를 한 모양이지? 사카사키 나츠메는 아오바 츠무기의 인간으로써의 부분을 가지고 떠나버렸다."
"역시 그랬군요...."
"음, 아마도 요괴화 된 아오바 츠무기가 이 회사를 부숴버리기라도 바랐던 모양이지."
"...어째서...그런 짓을...?"
"그건 알 수 없다. 난리 끝에 아오바 츠무기를 제압하긴 했지만 요괴가 된 그는 시종일관 사카사키 만을 찾을 뿐, 대답도 안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대로 죽게 내버려둬도 됐지만, 그의 근간이 되는 요괴는 제법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죽지도 않을테니 언젠가 쓰게 하기 위해 회사의 지하 깊은 곳에 봉인을 해두었다. 그 뒤로 사카사키는 몇 번인가 이 요괴를 내놓으라고 쳐들어 온 적도 있었다."
상사의 말에 안즈는 나츠메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럼 그 날도 쳐들어왔던 거구나. 그 날은 제법 햇빛이 따스한 봄날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수를 받던 도중에 귀가 아플 정도의 경보음이 들렸다. 그리고 곧 요란한 소리가 로비에서 들려왔다. 호기심에 같이 연수를 받던 동기들과 함께 대피를 하면서도 흘끗 쳐다보았던 로비에서는 척 봐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와 금발의 그림자가 화려한 선을 남기며 춤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는 안전셔터가 내려와 그 이상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나중에 경보음이 멎고 나간 로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날의 일을 떠올린 안즈는 파일을 손에 들고는 뭔가 결심을 한 듯, 나츠메를 만나러 가기 전에 아오바 츠무기를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상사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고 한참을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빠르든 늦든 보게 되겠지. 허락한다. 출입증은 내가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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