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잿빛수채화'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8.07.09 :: 끝나지 않는 마을 03.
  2. 2018.07.07 :: 끝나지 않는 마을 02.
  3. 2018.06.30 ::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4. 2018.02.22 :: 잿빛수채화 04.
  5. 2018.02.21 :: 잿빛수채화 03.
  6. 2018.02.20 :: 잿빛수채화 02.
  7. 2018.02.18 :: 잿빛수채화 01.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7. 9. 00:59

차는 제법 오래된 시골 길을 달렸다. 창 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츠무기는 이 곳이 이렇게 멀었던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다. 이 먼 곳을 혼자도 아니고 어린 자신을 데리고 나온 어머니는 상당한 각오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눈에 익은 풍경이 계속해서 옆을 스쳐갔다. 츠무기가 감상에 빠진 한편, 나츠메는 혀를 차고는 차를 세우라고 말했다. 츠무기가 길 한복판이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내린 나츠메는 품에서 부적을 꺼내서 앞으로 날렸다. 그러자 허공에 닿은 부적에는 불이 붙었고, 그 부적은 이내 재가 되어 날아가버렸다.

"...그럼 그렇지."
"나츠메 군, 이건...."
"결계야. 여기부터 시작인 것 같네."
"어째서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죠? 들어오는 사람은 전부 받아들이....?! 나, 나츠메 군...!"
"선배!"

의아해하며 츠무기가 결계 근처로 다가간 순간, 츠무기의 몸은 결계 너머에서 나온 수많은 손에 잡혔다. 나츠메는 급하게 손을 뻗어 츠무기를 잡았지만, 그는 순식간에 결계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결계 안으로 함께 들어가게 된 나츠메와 소라는 곧 마을 바깥쪽의 숲에 떨어졌다. 단단한 땅에 부딪쳐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나츠메는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안에 들어오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츠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날아온 소라를 받아내서 가만히 땅에 세워준 나츠메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일단 기계가 먹통이 된 건 아닌지, 작동이 되긴 했지만 정작 중요한 통화는 되지 않았다. 통화권을 이탈했다는 표시를 보고 혀를 찬 나츠메는 우선은 앞으로 가보자며 희미하게 불빛이 흘러들어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내내 소라는 나츠메의 소맷부리를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스승~. 여기가 카쿠레자토인가요?"
"응, 그렇단다. 뭔가 보이니?"
"...굉장히 슬픈 색이 가득합니다. 소라의 마음도 슬퍼져요...."
"소라는 빙의당하기 쉬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조금 더 힘들겠구나. 하지만 정신차리렴. 너마저 먹혀버리면 선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 네, 소라, 힘낼게요!"

자신의 말에 제 뺨을 두어번 두드리고 주먹을 꼭 쥔 팔을 힘껏 펼친 소라를 보며 미소짓던 나츠메는 숨을 죽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생존자가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은 나츠메는 이내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음을 느끼고 그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마을 회관이었다. 나츠메와 소라가 회관의 문을 열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갑자기 몰린 사람들의 시선에 겁을 먹고 제 뒤로 숨은 소라의 손을 꼭 잡아준 나츠메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게 전부야?"

나츠메의 질문은 회관 안에 긴 정적을 가져왔다. 처음에 나츠메와 소라를 보며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그 질문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참 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어나왔다. 자기를 이 마을의 촌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자네의 말대로, 살아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라고 했다. 촌장의 말에 새삼스럽게 회관 안을 둘러본 나츠메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혀를 찼다. 있는 것은 전부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힘을 쓸만한 남자는 하나도 없느냐는 질문에 촌장은 덤덤하게 일을 할만한 남자의 절반은 죽고, 나머지 절반은 도망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건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자기같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뿐이라는 말에 손을 뻗어 촌장의 멱살을 잡은 나츠메는 주변에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리자 작은 칼을 빼어들고 그의 목에 들이대곤 더이상 소란을 피우면 이 사람을 죽이겠노라고 협박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말에 경악하며 입을 다물자, 나츠메는 칼을 치우지 않은 채 질문을 바꾸겠다고 말하곤 웃었다.

"젊은 남자를 몇 명이나 신사에 바쳤지?"
"....... 그것까지 알고 있는 건가."
"그래. 그러니 어설프게 수작부리지 말고 말해."
"지금까지 마흔 세 명...."
"이 마을의 규모 치고는 꽤 많은데?"

흐응,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낸 나츠메는 칼을 좀 더 촌장의 목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자 겁을 먹은 건지, 그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바치게 되었다며 묻지도 않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마을은 전국시대에 사람을 제물로 바쳐 안녕을 기원하던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중간에 깊은 우물을 파서 나무 지지대를 묻고 그 안에 사람을 묶고는 규토로 땅을 메웠다. 그것은 자신들이 모시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고, 마을은 그 신이 지켜주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에는 죽어가는 병사들이나 포로들을 쓰곤 했는데, 전쟁의 방법이 바뀌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면서 더이상 제물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나자 마을에서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병이 유행을 하기 시작했고, 여러 곳에서 크고작은 사고가 터졌으며, 마을의 존속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신사에서 혼을 달래고 있던 아오바 가문의 남자들이 많은 의논 끝에 대대로 집안의 장자를 바치기로 결론을 내리면서 마을은 다시 한 번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 말을 들은 나츠메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촌장의 멱살을 잡은 손을 거칠게 놓은 뒤에 주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이기적인 인간들 같으니라고.... 당신들은 전부 바보에 머저리야."
"...아무 것도 모르는 외부인이 함부로 말하지 마!"
"신에 대해서는 내가 당신들보다 더 잘 알아. 나는 언령사니까."
"...뭐라고?"
"이참에 말해주지. 수백 년 동안 요괴에게 속아온 어리석은 인간들."
"...요괴...라고?"

우리 마을을 지켜주던 게 사실은 요괴였단 말이야? 아니, 누구면 어때. 이 마을을 지켜주던 건 변함이 없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요괴는 조금.... 마을 사람들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지는 가운데, 촌장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츠메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빤히 보았다. 아무래도 당신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라는 말에 촌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의 가문은 원래 그 마을의 다이묘(大名)였는데, 선조가 패전하고 마을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수호신을 소환했다고 한다. 물론, 그게 신이 아닌 요괴라는 것은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밀이 되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나츠메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래서 지금까지 마을로 찾아온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아 흉흉한 소문이 돌게 만든 거냐며 투덜대고는 인주신사의 지하로 자기를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 촌장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부인에게는 알려주지 않겠다?"
"…당신은 언령사니까요. 이 마을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저기, 촌장님. 지금이 몇 년인 지 알아?"
"…알고 있습니다."
"2018년이야, 2018년. 다른 말로는 헤이세이 30년."
"……."
"이제 이 마을을 지켜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나츠메의 말에 촌장의 침묵은 더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 나츠메의 눈에 띈 것은 한 어린아이의 몸이었다. 그 아이의 몸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아이의 옷을 걷어본 나츠메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의 몸에 든 멍은 절대 학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시퍼렇다 못해 죽어가는 손자국은, 그것은, 너무나도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냄새가 나는 저주였다. 나츠메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제야 입을 연 촌장은 그 아이 말고도 이미 몇 명은 온몸에 저주가 퍼져 죽어버렸다고 했다. 외부로부터 마을을 지킬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마을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대가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다. 아오바 가문의 여자가 아들을 데리고 도망간 다음부터 마을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원망섞인 말에 나츠메는 그 말을 다시는 못 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면서 소라의 손을 잡고 마을 회관을 나섰다.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2.  (0) 2018.07.07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0) 2018.06.30
잿빛수채화 04.  (0) 2018.02.22
잿빛수채화 03.  (0) 2018.02.21
잿빛수채화 02.  (0) 2018.02.20
posted by 스위스무민
: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7. 7. 18:29
"나를 못 믿는 게 아니면 어째서 안 가겠다는 건데?"
"나츠메 군을 너무 믿어서 갈 수 없는 거예요."
"내 핑계를 대고 피하지 마. 선배는 지금 그 안에 있는 것 때문에 가기 싫은 거잖아?"
"그래서 안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아니, 선배는 지금 피하고 있어."
"…기분 탓이에요. 제가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츠무기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나츠메는 시선을 츠무기에게서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장소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겠지만 선배가 생각하는 그 곳이 맞다고. 그 말에 츠무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곳인 걸 알면서도 자기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나츠메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했건만 나츠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데. 그 위험부담을 굳이 안고가야 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고 투덜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나츠메는 츠무기의 멱살을 잡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닥치고 따라와."
"…어째서 매번 그렇게 강압적인 거예요?"
"선배는 어째서 매번 그렇게 도망가는데, 그러면?"
"그러니까, 도망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피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츠메는 츠무기의 멱살을 놓고는 내일 오후엔 출발할 거니까 알아서 잘 생각해보라고 하고는 깊이 잠든 소라를 방으로 옮겼다. 나츠메가 소라를 편하게 재우는 사이 츠무기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는 나츠메를 걱정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인주신사(人住神社)가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 곳은 어떤 마을과도 교류가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마을의 이름을 카쿠레자토(隠れ里-저세상, 혹은 돌아오지 못하는 곳)라고 칭했다. 카쿠레자토는 주변 마을에서조차 그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으며, 길을 잃은 아이가 흘러들어오면 그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카미카쿠시(神隠)의 마을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오바 츠무기는 그 마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이니까.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그 마을에서 데리고 나와 사카사키 집안에 맡기기 전까지, 그는 그 곳에서 앞으로의 마을을 짊어질 기둥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삶을 추억해 보면 그렇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게 말렸으니까. 심지어 숨을 쉬는 것 조차도 언젠가는 허락을 받아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정말이지. 나츠메 군과 있으면 싫은 기억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츠무기는 소파에 드러누워버렸다. 불을 끈 뒤에 드문드문 빛나는 야광별의 조각들이 마치 흩어진 자신의 조각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스티커는 사카사키 가문에 얹혀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붙인 것이었다. 나츠메는 어릴 때부터 영감이 강한 아이였고, 그래서 자신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반쪽을 꺼리게 된 것이라고 츠무기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나왔을 때 츠무기의 절반은 이미 요괴화가 된 상태였다. 아마 성인이 되면 완전히 요괴가 되어 그 마을 지하 깊은 곳에 봉인이 될 터였다. 그것이 아오바 가문의 남자들의 의무였다.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결국은 그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그를 데리고 도망쳐나왔다. 마을은 완전히 뒤집혔고, 추적자가 따라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츠무기의 어머니가 그 마을 최고의 무녀였다는 사실이었다. 추적을 뿌리치고 뿌리친 끝에 다다른 곳은 이상하게 다른 곳과는 동떨어진 곳에 지어진 제법 그럴듯한 양옥이었다. 그 주변으로 강한 결계가 쳐있는 것을 느낀 츠무기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달려가 그 집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곳에서 나온 건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강한 느낌의 여성과 그녀를 많이 닮은 여자아이였다. 그 여자아이가 사실은 남자아이였다는 건,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때의 나츠메 양은 좀 더 수줍음이 많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말이죠...."
"일 말고도 다른 걸 생각할 시간이 있다니, 아주 여유가 넘치네, 선배?"
"나, 나나, 나츠메 군?! 잠든 것 아니었나요?"
"소라만 재우고 나왔어."
"...그럼 인기척 좀 내주세요."
"선배가 자는 줄 알았거든."

그렇게 말하고 부엌의 작은 등을 켠 나츠메는 따뜻한 차를 우려서 츠무기에게 한 잔을 건넸다. 테이블에 와서 잔을 받아들고 맞은편에 앉은 츠무기는 가만히 따뜻한 잔을 손에 쥔 채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 뗐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서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냐는 츠무기의 질문에 나츠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츠메는 자기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좀처럼 알려주지 않아서 조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하고 잔을 내려놓은 나츠메는 그의 고향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거절하지 않았느냐는 츠무기의 원망 섞인 질책에 나츠메는 한숨을 내쉬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언제까지 도망만 갈 수는 없잖아. 그 녀석을 떼어내든지, 그 녀석과 융합하든지. 선택할 때라고 생각 안 해?"
"...하지만 이건."
"원해서 생긴 힘도 아니고, 마음대로 제어를 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나츠메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지나치게 어린 시절에 도망쳐나온 것 때문에 츠무기 안의 요기는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고심 끝에 그 안의 요기를 봉인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반동의 여파로 쓰러졌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츠메는 그 요기때문에 몇 번인가 크게 다칠 뻔했고,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츠무기의 혼을 분리해내면서 일시적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분리된 혼 중 인간의 부분이 함께 있으면 제어를 하기 쉽도록 츠무기와 나츠메에게 각종 주술을 가르쳐 준 것도 그녀였다. 특히 나츠메에게는 외부에서 츠무기의 혼을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주술들을 알려주었고, 나츠메는 재능이 있어서인지 그 주술들을 무리없이 습득해갔다. 그 사이에 한참 츠무기를 찾는 데에 총력을 다했던 카구레자토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지도에도 없던 마을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계속 이어지니 사람들이 집중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 어딘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주술을 연마하다가 텐쇼인 회장의 눈에 들었고, 그렇게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회사를 떠나 왔지만. 여기까지 생각하던 츠무기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아까부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츠메를 마주보았다.

"왜 갑자기 카쿠레자토가 다시 나타난 걸까요?"
"뭐, 이제는 실체가 없는 소문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늘기도 했고...."
"...그리고요?"
"인주신사의 새 제물이 필요해졌을지도 모르지."
"...새 제물...인가요?"
"선배가 그 마을을 나온 지 얼마나 됐지?"
"...제가 일곱 살 때니까, 적어도 십 년은 됐네요...."
"그 전의 제물이 목숨을 다했대도 이상하지 않을 때잖아?"
"...그러네요."
"인간 제물의 무시무시한 독기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아오바 집안의 남자들 뿐인 것 같고 말이야."

뭐,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지만. 담담하게 말하며 나츠메는 마지막 남은 차를 비우고 잔을 가볍게 씻어서 뒤집어 놓으면서 츠무기에게 물었다. 지금 그 마을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에 츠무기는 마음 한 구석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자기를 데리고 나온 것은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텐데. 자기는 그저 제 안의 요기가 폭주할 것이 두렵고 그로 인해 나츠메마저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츠메가 따라준 차를 다 마시고 잔을 씻어두면서 츠무기는 가만히 심호흡을 하고는 나츠메에게 내일, 자기도 함께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츠메는 후회해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곤 자기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3.  (0) 2018.07.09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0) 2018.06.30
잿빛수채화 04.  (0) 2018.02.22
잿빛수채화 03.  (0) 2018.02.21
잿빛수채화 02.  (0) 2018.02.20
posted by 스위스무민
: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6. 30. 19:38
[나츠메 군, 나츠메 군~]
[우리 귀여운 막내씨~, 뭘 하고 있나요?]

피코피코. 연달아서 울리는 메시지 수신음에 나츠메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버렸다. 마치 그런 행동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소파에 핸드폰이 닿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결국 나츠메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핸드폰 너머에서는 경쾌한 목소리가 서운함을 담은 채 우리 사이에 어떻게 대답도 안할 수 있냐는 등의 말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나츠메는 한쪽 귀를 막은 채, 혼자 떠들기만 할 거라면 이만 끊겠다고 투덜거렸다. 그제야 상대방은 미안하다며 부탁할 게 있어서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안즈를 통하지 않은 연락은 꽤나 오랜만이라, 나츠메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이어폰을 연결하고는 소파에 누워 용건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게 말이지요, 마을 하나가 통째로 결계에 잡혀있는 것 같답니다~.]
"그런 얘기라면 결계사를 부르는 게 빠르잖아? 왜 언령사를 찾는 거야?"
[우후후후, 유감스럽게도 우리 결계사들 중엔 나츠메 군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없어서 말이지요!]
"회사는 인재가 너무 부족하네, 정말이지."
[그래서 말인데요~, 나츠메 군. 다시 돌아와주지 않겠습니까?]
"끊는다."

냉랭한 나츠메의 반응에 상대는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고 하며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결계사가 아니라 언령사인 나츠메를 찾은 건 지금까지 결계사들은 그 마을을 그대로 [통과]해버렸기 때문이란다. 그 마을이 있다는 걸 인식을 한 상태에서도 풀리지 않는, 아니, 풀 수 없는 결계라는 말에 나츠메는 흥미가 동하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반응을 잡아낸 히비키는 씨익 웃으면서 정식으로 의뢰를 하고 싶다고 운을 띄웠다. 나츠메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자긴 비싸다고 했지만, 히비키는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에게 부탁할 심산인 히비키의 말에 나츠메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뭐, 이번 건은 의뢰를 받아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인가요? 어떤 거죠?]
"형이 찍은 내 사진. 당장 지워."
[에에에에?! 어째서죠? 이제는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랑스러운 막내의 사진인데!]
"그 막내의 '여장'사진이겠지. 지울 거야?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아."
[흑흑, 어쩔 수 없네요. 형아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사진이었는데에...훌쩍훌쩍.]
"스승님."

나츠메가 딱딱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스승님, 이라고 말하자 히비키는 질색하면서 사진을 지울테니 호칭을 고쳐달라고 했다. 나츠메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히비키의 애원에 겨우겨우 형이라고 호칭을 고쳐주고서야 제대로 의뢰를 받았다. 나츠메의 메일로 조사보고서를 보낸 히비키는 그 마을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는 보고를 받은 건 한 달 전이라고 했다. 그 뒤로 회사에서는 꽤 여러 명을 파견한 모양이지만, 누구도 마을 안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마을 입구가 보이는가 싶으면 짙은 안개가 끼어 목적지를 잃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 마을을 통과해버린다고 한다. 어떻게든 입구까지 도달한 결계사들은 있었지만, 그 결계를 풀지는 못했다고 했다. 위치는 큐슈의 옛 유적지 근처 마을이라나. 그 말을 들은 나츠메는 낮게 콧소리를 내며 지도를 뒤적거렸다. 위성지도로는 혹시나 무언가 보일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 시도는 허탕만 쳤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네. 나츠메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히비키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끊긴 전화를 보던 나츠메는 한숨을 내쉬고 소라와 츠무기에게 연락을 했다.

[네~. 무슨 일이에요, 나츠메 군?]
"선배, 장 다 봤으면 들어와. 되도록 빨리."
[에에? 방금 계산을 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일하러 가야해."
[지금부터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지."
[우우, 저는 '감옥'에서 나온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녜요?]

불평이 조금 묻어나는 츠무기의 목소리에 그러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든가, 라고 말한 나츠메는 그건 싫다며 바로 들어오겠다는 츠무기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꽤 먼 곳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소라의 부적 덕분인 걸까? 비명소리와 함께 10분도 안되어 도착한 두 사람은 나츠메가 있는 소파에 늘어졌다. 제 위로 실린 무게에 짜증을 내며 두 사람을 밀어낸-그래도 소라는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내지 못해, 소라는 겨우 누워있던 나츠메의 옆으로 옮겨앉은 정도였다. - 나츠메는 장을 본 것을 정리하면서 얘기를 들으라고 하곤 이번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츠메에게 밀려나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쓰고 물건을 차곡차곡 채워넣던 츠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이번 마을은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는 거네요."
"반대로 말하자면 '나올 수 없는 마을'인 거지."
"그 마을 사람들도 참 안됐어요.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요?"
"글쎄. 하지만 어떤 결계도 완벽하진 않아. 게다가 마을 하나를 통째로 감쌀 정도라면 말이지."
"으음, 그렇겠네요. 어딘가에는 틈이 있을 거예요."
"정 안되면 선배 안의 「그 녀석」으로 태클이라도 걸면 결계가 흔들리겠지."
"에엑?! 농담이죠, 나츠메 군? 아무리 저라도 결계의 종류에 따라선 타버린다고요?!"
"아, 그것도 괜찮겠네. 타버리면 잘 묻어줄게."

저를 향해 가볍게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는 나츠메의 건성인 태도를 보며 츠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저 아이는 나만 보면 못살게 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츠무기는 마지막 물건을 냉장고에 넣고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몸이 된 것도 아닌데. 아까 나츠메의 말에 순간적으로 올라온 살의를 내리누르느라 에너지를 쏟아 조금 지친 채로 저녁을 준비하던 츠무기는 나츠메에게 이번 의뢰 장소를 물었다. 나츠메는 제 옆에서 얘기를 듣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소라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다가 큐슈의 시골 마을이라고 답했다. 큐슈의 시골 마을... 츠무기의 인상은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나츠메는 그런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마을 중심에 인주(人柱)사당이 있는 곳이지."
"...그 곳에 절 데려가겠다고요? 진심이에요?"
"내가 선배를 제어 못 할거라고 생각해?"

나츠메의 말에 츠무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츠메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내서라도, 자신을 제어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진짜로 두려운 것은 일관적으로 그런 태도를 고수할 것이 분명한 나츠메였지만, 그는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인주사당이 있는 큐슈의 마을이라니. 까닥 재수가 없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곳을 굳이 스스로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츠무기는 자기는 이번 일에는 함께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츠메는 그 말에 잠시 손을 움직여 소라를 조금 더 깊이 재워놓고는 츠무기를 빤히 노려보았다.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3.  (0) 2018.07.09
끝나지 않는 마을 02.  (0) 2018.07.07
잿빛수채화 04.  (0) 2018.02.22
잿빛수채화 03.  (0) 2018.02.21
잿빛수채화 02.  (0) 2018.02.20
posted by 스위스무민
: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2. 22. 02:09

쿠누기가 나가고서 침대에 드러누운 나츠메는 옷이 불편했는지 바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소라에게 보건실에 있는 사이에 둘러본 것을 말해달라고 하자, 소라는 창문을 열고 작게 휘파람을 불어 식신을 불러들였다. 바닥에 화선지를 펼친 소라는 식신을 태워 그 재를 화선지 위에 뿌리고 손으로 인을 맺었다. 그러자 재는 서서히 학교의 모양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학생들에게 개방된 곳은 신교사와 기숙사 뿐이었지만, 그 외에도 학교 울타리 밖에 한 개의 건물이 더 존재하고 있었다. 아직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구 기숙사인 것 같았다. 그리고 신교사의 복도 끝, 나츠메가 발견했던 예전 반성실에는 유난히 많은 양의 재가 모여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장소라는 뜻이겠지. 소라의 식신이 만든 영상을 가만히 보던 두 사람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화선지를 없앴다. 똑똑, 재차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나간다고 답하며 문을 연 나츠메의 앞에는 어쩐지 뾰루퉁한 표정의 에리나와 곤란한 표정의 마나미가 있었다. 그제서야 나츠메는 방과 후에 에리나가 신문부를 안내해주겠다고 한 걸 떠올리고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그들을 방에 들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밝은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에리나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보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usb를 꺼내어 그 옆에 올려두었다.

"정말이지, 나츠메가 약속을 잊어버릴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하하, 미안해. 바로 선생님께 기숙사 안내를 받는 바람에 완전히 잊었었어."
"뭐, 괜찮아, 괜찮아. 지금은 학교 문이 다 잠겨있을 시간이니까, 특별히 에리나의 usb를 빌려줄게!"
"…괜찮은 거야?"
"사실은 조금 더 도와주고 싶지만~."
"우리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흐응."

미나미의 답에 낮게 콧소리를 낸 나츠메는 소라에게 문을 막으라고 지시하고는 의자를 끌어와 두 사람을 앉혔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나츠메를 보면서 긴장했는지 에리나는 미나미를 쳐다보다가 나츠메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침대에 편하게 앉은 나츠메는 두 사람을 빤히 보다가 [그 사정이란 게 뭔지 들어보자]며 웃었다. 나츠메의 말에 에리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미나미가 그런 에리나를 대신해 운을 뗐다. 너희들이 무슨 일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다고 한 그녀는 왜 너희들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선택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의 화가 너희들을 덮칠 거라고. 그 분이란 건 「코쿠리상」, 혹은 그 코쿠리상의 빙의체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츠메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소라에게 손짓을 해 그를 불러들이고는 두 사람을 내보냈다.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방에 결계를 치고 노트북에 에리나가 두고간 usb를 꽂은 나츠메는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오우카스미레 학원의 7대 불가사의…」. 제목을 소리내어 읽으며 나츠메가 연 폴더에는 영상이 있었다. 그 영상을 실행한 나츠메는 화면을 한참 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스승~, 이 영상의 장소…. 스승이 봤다던 반성실인가요?"
"응,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저 가운데에, 보이지? 최초의 빙의체야. 소라, 저 빙의체의 추적을 부탁할게."
"HoHo~, 알겠습니다!"

영상을 한참 지켜보던 소라는 주머니에서 소금을 꺼내어 콧노래를 부르면서 방 구석구석에 뿌려두고, 그 안에 흰 분필로 진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던 나츠메는 와타루에게 전화를 해 츠무기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와타루는 예상보다 빠른 요청이긴 하지만 내일이면 츠무기는 내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와타루의 말에 알겠다고 답한 나츠메는 그 사이에 진을 완성하고 들어가 앉아 추적을 시작하는 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라는 인을 맺고 주문을 읊은 다음 엄지손가락으로 진의 가운데를 찍어 눌렀다. 그러자 그가 분필로 진에 써둔 글씨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반 시진 즈음 후에 돌아온 글씨들은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글씨를 보던 소라는 자(子)시 방향에 그 빙의체가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 말에 나츠메는 이번 일은 선배의 힘이 필요해서 선배를 보내달라고 했으니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 말에 소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츠메의 옆에 털썩 누웠다.

"응? 소라, 네 침대는 2층이잖니?"
"HiHi~, 그렇지만 추적을 끝낸 뒤에는 스승~의 옆에서 자는게 안심이 되네~. 안 되나요?"
"뭐…. 안 될 건 없지만."
"HeHe~♪ 그럼 오늘은 스승~과 함께 자는 거예요!"
"그래. 이미 우리가 온 순간부터 「코쿠리상」은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다들 소라들을 노려본 걸까요?"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겠지. 이미 회사에서도 몇 번이나 실패한 상대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 좋게 「코쿠리상」을 없애요! 선배도 있다면 문제는 없네~."
"자, 내일은 준비해야할 게 많아. 그러니까 이만 자자, 소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스승~!"

제 옆에 붙어 재잘거리던 소라를 토닥여주며 나츠메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소라가 추적한 코쿠리상의 빙의체는 구 기숙사가 있는 쪽에 있었다. 그리고 귀문은 아무래도 그 반성실에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에리나가 건네준 영상은 반성실 안에서 코쿠리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능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학생들이 재미 삼아서 한 것이겠지만, 운이 나쁘게도 이 학교는 지리적 위치와 그 잔혹한 교육방식 때문에 부의 기운이 잔뜩 몰려있었기 때문에 영이 들러붙어버렸다. 그것도 어떤 존재라고 칭하기도 힘든 영기의 덩어리였다. 영매, 그러니까 빙의체가 되어버린 학생은 괴롭힘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코쿠리상은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들이 약한 대상에게 겁을 주기에는 최적의 괴담이었으니까. 그 학생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던 건지,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츠메는 욕실로 씻으러 가다가 어제 소라가 쳐둔 결계를 확인했다. 소금은 검게 타서 사라져 있었고 부적은 몇 개인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이중으로 결계를 쳐둔 게 정답이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씻고 나온 나츠메는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한 소라를 가만히 깨우고는 오늘은 수업은 됐으니 싸울 준비를 하자고 말했다. 그 말에 소라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졸린 눈을 비비며 욕실로 들어갔다. 관건은 회사에서 츠무기를 언제 보내줄 것이냐였지만, 와타루에게 직접 부탁한 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오바 츠무기의 배송은 정확히 땅거미가 지는 시각에 이루어졌다. 츠무기를 데리고 온 것은 안즈와 그녀의 상사였다. 안즈는 불안한 표정으로 츠무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츠무기는 특수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나츠메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츠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츠무기의 목에 달린 사슬을 잡아 땅에 끌어내리고는 그의 등을 밟은 채 주머니에서 푸른 돌을 꺼내어 괴성을 지르고 있는 그의 입에 집어넣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츠무기의 몸에 매어있던 붕대의 경문이 녹아내리면서 붕대도 함께 사라졌고, 계속 버둥거리던 츠무기는 한참을 얌전히 늘어져있다가 움찔거리고는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안즈의 상사가 건넨 열쇠로 그의 목에 매인 사슬을 풀어낸 나츠메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츠무기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나츠메를 바라본 츠무기는 안즈가 봤던 그 요괴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그를 끌어안고는 울먹이며 왜 이제 데리러 온 거냐고 말했다. 나츠메는 그의 등을 토닥이면서 지금부터 바빠질 건데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츠무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이 있다더니, 그게 이런 거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안즈는 그들에게 무운을 빈다고 말하고는 상사와 함께 오우카스미레를 뒤로 하고 떠났다.

멀어지는 회사의 특수차량을 보던 나츠메는 아무래도 갇혀있는 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다는 츠무기의 말에 한숨을 내쉬고는 소라에게 매점에서 적당히 먹을 것을 사오라고 하며 츠무기를 기숙사 방으로 데리고 갔다. 소라가 한가득 음식을 사서 돌아오는 사이에 츠무기에게 이번 일에 대해 설명을 끝낸 나츠메는, 배를 채우면 바로 조를 나눠서 출발하자며 자신은 옛날 반성실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빙의체의 위치는 소라가 알고 있고, 선배는 몰이역을 잘 해주면 된다는 말에 츠무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오랜만이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 말에 츠무기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 나츠메는 이번에 실패하면 그 녀석과 분리도 하지 않은 채로 회사로 돌려보낼 거라는 얘길 하자 츠무기는 울먹이면서 열심히 할테니까 제발 죽이겠다는 말을 돌려서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제법 빠른 속도로 소라가 가져온 음식들을 해치운 츠무기는 덥수룩해진 머리를 대충 묶고는 나츠메가 건넨 옷을 걸쳤다. 그리고 안경을 쓴 그는 빙의체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긴 밤이 되는 건 사절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끝내도록 하죠."
"오랜만에 선배랑 의견이 맞았네."
"오, 오랜만이라뇨!?"
"그 전엔 의견이 맞은 적이 있던가?"
"그, 그렇게 말하면…. 제가 거의 혼날 뿐이었으니까요…."
"선배의 '인간' 부분은 조금 답답하니까 말이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어머니는 최고의 무녀셨으니까요!"
"…그 점을 높이 사서 지금 데리고 다니고 있는 거니까, 빨리 움직이기나 하지?"
"네에…."

힘없이 일어난 츠무기는 소라의 안내로 빙의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빙의체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짙어지는 요기에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소라의 손을 꼬옥 잡으며 혹시나 자기가 정신을 잃거든 지체하지 말고 나츠메가 있는 곳까지 도망가라고 하면서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소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구 기숙사 건물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자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사이로 조각도가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얼굴을 스쳐간 조각도에 마른 침을 삼킨 두 사람은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그 곳에는 등에 검붉은 여우를 업은 소녀가 서있었다. 여우의 눈이 붉게 빛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며 그녀는 소름끼치게 웃었다. 너희들은 얼마나 버틸지 시험해보자며 달려드는 그녀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 츠무기와 소라는 그대로 창문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패닉상태로 주변을 살피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낡은 소화기에 부적을 붙인 소라는 츠무기와 함께 그것을 들어 창문을 부수고는 전력으로 나츠메가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한편, 나츠메는 반성실의 문에 붙어있던 부적을 떼고 나무 판자를 뜯어냈다. 반성실은 먼지와 함께 귀문에서 흘러나온 음기가 가득했다. 귀문이 있는 곳에 부적을 붙여놓은 나츠메는 도대체 이게 어디가 언령사가 필요한 일인 건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나중에 와타루를 만나면 이 불만을 전부 털어놓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본 나츠메는 바닥에 떨어진 「코쿠리상」의 질문판을 보았다. 제법 낡아있었지만 피가 얼룩져 굳어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걸로 질문을 하다 정말로 영이 붙자-보통은 무의식중에 자기 힘으로 동전을 움직이곤 하는 현상일 뿐이지만- 겁을 먹고 손을 떼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뭐, 오우카스미레가 자리잡은 땅은 워낙 음기가 강해서 그 영이 자리잡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으므로 그대로 눌러앉아버린 거겠지. 작게 한숨을 쉰 나츠메는 반성실에 굴러다니던 의자와 책상을 가져다놓고 질문판을 얹은 뒤, 그 위에 5엔짜리 동전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라와 츠무기가 반성실로 들어왔다. 반성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나츠메의 모습을 보고는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겨우 숨을 고른 츠무기는 나츠메를 보고는 지금 그러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츠메는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온 학생과 여우를 보았다. 위협적으로 나츠메에게 걸어온 학생은 조각도를 나츠메의 손가락 사이에 꽂았지만 나츠메는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보고 말했다.

[자, 손을 올려놔.]
"지금 뭘 하자는 거지? 인간…?"
[뭐라니, 코쿠리상이야. 자, 어서.]
"코쿠리상은 나다. 그러니까 내가 응해야 할 이유는 없어!"
"으음, 역시 이 방법은 안 통하나…."
"통할 리가 없잖아요!?"

자기에게 불평을 하는 츠무기를 노려봐준 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나츠메는 책상에 꽂아둔 조각도를 빼어들고 달려드는 학생의 공격을 흘려넘기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뒤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너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여우씨가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아. 네 손은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위한 손이 아니잖아, 사야카.] 나츠메의 말에 사야카의 움직임은 멈추나 싶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나츠메의 어깨에 조각도를 꽂아넣었다. 윽, 하는 짧은 비명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소라와 츠무기가 놀라서 달려오려고 했지만 나츠메는 손을 들어서 그들을 멈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이번엔 여우를 향해 도발을 시작했다. 어차피 일개 잡령주제에 왜 인간을 괴롭히느냐는 말에 분노한 여우는 나츠메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손이 멈췄다. 사야카의 손이 떨리는 걸 본 나츠메는 그대로 그녀의 배에 주먹을 꽂아 기절시키고는 츠무기에게 잘 돌보고 있으라고 말하며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문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야. 망할 여우야.]
"…크르르르."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한 영혼아, 네 고향이 부르노니….]

나츠메가 주문을 외우는 사이에 소라는 그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나츠메의 몸을 그가 앉아있던 책상과 연결해두고는 나츠메를 끌어안았고, 츠무기는 사야카가 휘말리지 않도록 결계를 펴고 그 안에서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 「코쿠리상」은 덩치가 큰 만큼 저항도 심했고, 그 덕분에 귀문으로 집어넣는 데에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그가 나츠메를 끌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소라가 나츠메를 묶어두지 않았다면 그 또한 귀문 너머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리라. 코쿠리상이 귀문으로 빨려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츠메는 츠무기에게 귀문을 닫으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기력을 다 소진했기 때문일까, 기절해버린 나츠메를 보던 츠무기는 그가 붙여둔 부적들을 보다가 손가락을 살짝 그어서 피를 내고는 그것으로 부적들 사이에 진을 그렸다. 진을 그리고 난 츠무기가 손을 크게 벌렸다가 박수를 치면서 닫자, 그와 동시에 귀문은 깔끔하게 닫혔다. 귀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한 소라는 나츠메의 몸을 연결해 둔 끈을 풀고 그를 츠무기에게 업혔다. 츠무기는 눈을 꿈벅이다가 나츠메를 업은 채 사야카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저, 저어…. 그러니까, 사야카 양? 일어나주세요."
"……으음."
"아아, 정신이 드나요? 다행이에요. 저, 한 번에 두 사람은 못 옮기거든요."
"…에…. 누구…."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고, 일단 여기서 나가죠. 이 자리는 아예 메워버리라고 해야겠네요~. 아, 그래도 아직 걷는 건 힘들 것 같으니까 소라 군이 조금 도와주세요~."
"HiHi~ 알겠습니다! 자, 이쪽이에요~♪"

소라의 손에 이끌려 나온 사야카는 오랜만에 보는 빛이 눈이 부신지 좀처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기나긴 밤을 빠져나온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건, 생각보다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저 회색으로만 가득했던 세상이었던 것 같은데.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마냥 눈을 끔벅이던 사야카는 조금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나츠메가 이 표정을 봤다면 분명히 만족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은 그녀와 함께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나츠메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의 일이었다.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2.  (0) 2018.07.07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0) 2018.06.30
잿빛수채화 03.  (0) 2018.02.21
잿빛수채화 02.  (0) 2018.02.20
잿빛수채화 01.  (0) 2018.02.18
posted by 스위스무민
: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2. 21. 21:05
비록 임시라고는 하지만, 전학을 가야 하는 날이 밝았다. 거울 앞에서 교복을 입은 나츠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가야하는 곳이 여학교라니…. 괜히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는 스승과 같은 옷을 입었다며 마냥 들뜬 제자가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런 꼴을 츠무기가 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츠메는 제자를 불러 옷깃을 정리해주고는 가방을 챙겼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차를 타고 오우카스미레까지 가는 길은 제법 스산했다. 울창한 침엽수림을 빠져나간 언덕에 있는 학교는 잘 관리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학교까지 들어가면서 주변을 살펴보던 나츠메는 작게 콧소리를 내면서 차에서 내렸다. 악명이 높을 만하다고 해야할까? 오우카스미레는 공부에 얽매여 체력도 없는 학생들이 도망치기 힘든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환경이 만들어낸 천연 감옥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러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겠지. 어쩐지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리본을 조금 풀어낸 나츠메는 자기 제자와 함께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은 정장을 잘 갖춰입은, 한 눈에 봐도 깐깐해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을 보더니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들을 자리에 앉혔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카사키 나츠메입니다."
"하루카와 소라네~, 잘 부탁해요!"
"아직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인데도 히비키 이사님의 추천을 받을 정도의 실력이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뭐, 대략적인 얘기는 보고서로 받긴 했습니다만, 최초로 사건이 일어난 교실은 어디죠?"

기대라. 좋을대로 말하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나츠메는 일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교장은 두 사람이 오늘부터 지낼 교실이라며, 내선전화로 담임교사를 불렀다. 문을 열고 담임교사가 들어온 순간, 나츠메는 이 학교에는 죄다 저런 교사들 밖에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한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교사는 얇은 테의 안경을 살짝 올려쓰고는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자기가 담임인 쿠누기 아키오미라고 말했다. 교장부터 담임까지 하나같이 깐깐해보이는 인상에 나츠메는 속으로 꽤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을 안내해주라는 교장의 말에 쿠누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데리고 교실로 향했다. 어쩐지 숨막히는 공기가 계속되는 복도를 지나면서, 쿠누기는 두 사람에게 작은 책자를 하나 주었다. 그 책자에는 학교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으며, '학생규칙'이라고 제목이 적혀있었다. 그 말인 즉슨, 이 책자에 있는 내용이 전부 오우카스미레의 교칙이라는 것이다. 소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사이, 쿠누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둘을 쳐다보며 일단은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야 할 테니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다. 소라는 자신이 없는지 교실로 가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츠메는 그런 소라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교실은 무척이나 조용해서, 문이 열려도 들리는 소리는 펜이나 연필로 필기를 하는 소리 정도였다. 쿠누기가 교단에 서는 것과 동시에 그 소리는 일시적으로 끊겼다. 그리고 반장으로 추정되는 학생이 일어나서 일어나, 차렷, 경례라고 구호를 붙이자 학생들은 일제히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평안하셨습니까. 경직된 분위기 안에서 우러나온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는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쿠누기는 평안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받은 뒤에 나츠메와 소라를 전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교탁에서 받은 아이들의 시선에 소라는 겁을 먹었는지 슬쩍 나츠메의 손을 잡았다. 나츠메는 그런 소라의 손등을 가만히 토닥여주고는 태연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마쳤다. 하지만 생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반 아이들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에 조금 더 가까웠다. 일년이나 이런 학교에 있다보면 그렇게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선생님이 지정한 자리로 걸어가던 나츠메는 그 멍한 시선들 가운데 유난히 맹렬하게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도대체 누구지 싶어서 고개를 돌리던 그는, 진한 캐러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녹색 눈과 마주쳤다. 다른 아이들이 거부감과 의문을 표시하는 것에 반해, 그 소녀는 호기심을 만면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모두가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코쿠리상을 불러낸 것도 이런 일부의 아이들이었던 걸까?

"나츠메~라고 불러도 돼?"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잖아? 마음대로 하렴."
"앗, 고마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로 찾아온 그 캐러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자기를 에리나라고 하면서 옆에서 이것저것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가끔씩 꽂히긴 했지만 에리나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곧잘 얘기를 하는 만큼 호기심도 많은 건지, 그녀는 금세 나츠메와 소라에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개인정보를 그다지 넘기고 싶지는 않았던 나츠메가 슬쩍 말을 돌리며 피해가는 걸 눈치챈 에리나가 그에게 불만을 토로할 즈음,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다가와 에리나의 머리에 가볍게 손칼로 촙을 먹였다. 에리나는 그녀에게 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고, 그녀는 시원하게 웃으면서 나츠메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저 바보가 귀찮게 한 것은 대신 사과하겠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미나미로, 에리나와는 소꿉친구라고 했다.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 자기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미나미의 뒤로는 엄청난 시선이  느껴졌다. 질투, 라는 말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시선들에 나츠메는 사흘 안에 일을 끝내고 이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에게 웃음으로 답했다.

수업시간은 정적의 연속이었다. 입학할 때부터 스파르타 식으로 가르치고 못 올라가는 학생들은 따로 관리한다더니,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도 이미 일반 고등학생의 수준을 초월한 것이었다. 소라는 이미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열이 난다며 보건실로 가버렸고, 나츠메는 그런 그에게 이 틈에 식신을 써서 주변을 둘러보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계속해서 수업을 들었다. 어려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더러 눈에 보였지만 교사는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전원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는 모양새에 나츠메는 의문을 품었다. 매년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 오우카스미레인데,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따라올 수 있는 녀석들만 따라오라는 교사들의 태도였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잠이나 독서로 보냈다. 더러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점심시간에 들을 수 있었다. 전학생에게 살갑게 다가온 에리나와 미나미는 그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부분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 이어폰은 학교에서 특별히 지급한 전용 이어폰으로, 특수한 파장이 나와 뇌를 자극한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실력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말에 나츠메는 혀를 내둘렀다.

"공부 기계라도 찍어내려는 모양이네, 이 학교는."
"알고서 전학온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이사 온 집에서 가까워서 온 건데."
"그럼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우리 반은 조금 덜 한거야."
"...뭐?"

이미 충분히 숨막혔는데, 이게 덜 한거라고? 기가 막히다는 나츠메의 표정을 본 두 사람은 풋, 하고 웃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흔들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학교는 실력별로 A반부터 E반까지 클래스를 나눠서 관리하고 있고, 그 중에서 A반은 특별진학반이라 교사들의 관심과 관리가 어마어마하며, 그 아래로는 알파벳이 낮아질수록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자유로운 것은 E반이냐고 묻자, 두 사람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건 오히려 D반일 것이라고 했다. E반은 학교에 적응을 못하거나 대형사고를 쳤거나 해서 다음 시험 성적에 따라 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인 아이들이 모여있어서 A반과는 다른 긴장감이 감돈다고 했다. 매년 자살하는 사람도 대부분 E반에서 나온다는 에리나의 말에 미나미는 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비밀인 건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던 나츠메는 자기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두 사람을 보고는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있지, 이 학교에는 7대 불가사의라던가 하는 것 없어? 있으면 알려줬으면 하는데.]
"7대 불가사의? 그거라면 신문부에 자료가 있을거야. 에리나는 신문부니까, 방과 후에 안내해줄게!"
"고마워, 에리나."
"천만에! 그것 말고도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학교 신문은 정기적으로 발행해야 하니까 가십거리라면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거든!"

자기 가슴을 툭, 치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에리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 나츠메는 두 사람에게 오후 수업에 대한 안내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중간중간 복도에서 떠들지 말라며 잔소리를 하려던 교사들도 나츠메를 보더니 전학생을 안내해주고 있으니 이번만 특별히 봐주겠다며 다시 길을 가곤 했다. 복도에서조차 큰 소리는 안 되는 건가. 정말 숨막히네. 혀를 슬쩍 빼물어 답답함을 표시하던 나츠메의 눈에 복도 끝에 나무판자가 덧대어있고 그 위에 낡은 부적이 붙은 문이 보였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인 채 나츠메가 움직일 줄을 모르자 먼저 가던 두 사람이 의문을 표하며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말에 복도 끝을 가리키며 저기에는 무엇이 있냐고 묻자 에리나와 미나미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으로 나츠메의 손가락을 내리고는 잰 걸음으로 교실로 향하며 그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저기는 옛날에 반성실이었대."
"반성실...?"
"응, 그런데 요즘은 반성실도 다른 곳으로 옮겼거든. 그래서 폐쇄된거야."
"흐응.... 그렇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은밀하게 말하는 거야?"
"저긴 공식적으로 학교에는 없는 곳이거든."

공식적으로는 없는 곳이라는 말에 나츠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쓰였다는 얘기겠지. 우선 저곳부터 조사해보도록 할까. 그렇게 결심한 나츠메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자리로 돌아온 소라에게 아까 봤던 '반성실'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그곳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소라는 호호~하는 소리를 내며 나츠메의 말을 유심히 듣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고 쿠누기에게 불려가 기숙사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생각보다 낡은 양옥에 마른 침을 삼켰다. 두 사람의 방을 알려준 쿠누기는 짐을 풀려는 나츠메에게 뭔가 단서를 잡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츠메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생각보다 학교가 넓어서 아직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학교의 체벌제도에 대해 물었다. 안경을 가볍게 올려쓴 쿠누기는 그걸 왜 궁금해하느냐고 하면서도 현재 남아있는 건 반성문을 쓰는 것과 반성실에서 자기 태도에 대해 돌아보는 것뿐이며, 나머지는 벌점제도로 대체되었다고 답했다. 작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나츠메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고 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아 쿠누기를 보았다.

"이 학교에는 집단괴롭힘이 있나요?"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방금 질문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나요?"
"그럼요. 학교에선 의외로 어떤 일이든 생기는 법이니까요."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2.  (0) 2018.07.07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0) 2018.06.30
잿빛수채화 04.  (0) 2018.02.22
잿빛수채화 02.  (0) 2018.02.20
잿빛수채화 01.  (0) 2018.02.18
posted by 스위스무민
: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2. 20. 00:19

상사에게서 받은 출입증을 들고 회사의 지하로 향한 안즈는 경비원의 안내로 보안벽을 통과해서 회사의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지하 감옥에 대한 얘기는 줄곧 들었었지만 실제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고위 간부들 정도였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설레고 있었다. 이런 기분을 그녀의 상사에게 말한다면 '소풍을 가는 것이 아니니 쓸데없는 것으로 들뜨지 마라.' 는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지금은 혼자였으므로 안즈는 그 기분을 잠깐 만끽하기로 했다. 회사의 감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누구나가 감옥이라고 했기에 조금 더 살풍경한 모습을 상상했었다. 아니, 어쩌면 창살은 없지만 이게 더 살풍경할 지도 모르겠다고 하얀 천장과 바닥을 보며 안즈는 생각했다. 회사의 감옥에는 예전에 대사건을 일으킨 요괴들이 봉인되어 있는 유골함들이 강화유리벽 너머에 놓여있었다. 유골함 하나하나가 그 크기에 비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분명히 연수때 들었던 설명으로는 강력한 요괴일수록 요기 자체를 완전히 봉인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 다른 요괴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쉬워 일부러 거리를 띄워둔 것이라고 했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원은 걸음을 멈췄다.

"아오바 츠무기. 면회다."
「…….」
"…저, 아오바…씨?"

아오바 츠무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식음을 전폐했다던 그의 몸은 이미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머리카락은 수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자라 있었다. 그리고 몸에는 경문이 적힌 붕대가 부적 대신 감겨있었다. 다른 요괴들처럼 함에 보관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존재라는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즈가 몇 번이나 츠무기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 유리창에 강하게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난 소리에 경비원은 바로 경봉을 꺼내들었고, 안즈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츠무기는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채 손톱으로 유리를 긁어대며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메, 나츠…메…. 」
"……!"
「너, …냄새…. 너….」
"냄새…?"

냄새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옷에 코를 묻고 킁킁대던 안즈는 영문을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츠무기를 쳐다보았다. 츠무기는 몇 번 더 유리를 긁어대다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 말을 본 안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본 츠무기는 알아 들었으면 사라지라는 듯 손을 휘젓고는 구석에 가서 등을 둥글게 말고 누워버렸다. 빳빳하게 얼어버린 채 회사에서 나온 안즈는 나츠메에게 전화를 걸면서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아오바 츠무기는, 사카사키 나츠메에게 나가면 네놈의 목을 비틀어 따버릴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게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즈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는 사이, 신호가 끊기고 날카로운 나츠메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수를 지급할 생각이 든 모양이지?"
"…이번 일에 대한 보수 말인데…."
"왜 망설이는 걸까? 괜찮으니까 말해보렴."
"…아오바 츠무기의 해방이라는데…괜찮겠어, 나츠메 군?"
"꽤 큰 카드를 꺼내들었네. 그만큼 벅찬 상대라는 걸까. 선배를 돌려준다면 나야 대환영인데."
"하, 하지만…! 하지만 그 사람, 갑자기 나한테서 나츠메 군의 냄새가 난다고 하더니 나가면 널 죽여버리겠다고 했어. 정말로 괜찮아?"
"아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대책은 확실하거든."
"…대책?"
"아니면 안즈는 내가 그런 녀석에게 죽을 것 같은 거야?"

나츠메의 말에 안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츠메는 자기보다 먼저 회사에 적을 두었다가 금세 나가버려서 그가 회사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이후의 행적이라면 몇 번인가 회사의 명령으로 그를 마주친 적도 있고, 파일을 살펴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가까이서 본 츠무기의 위압감은 보통이 아니었는데…. 한참을 그녀가 말이 없자 나츠메는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며, 이번 의뢰는 특별히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대신 말한 조건을 어겼다간 정말로 회사를 다 뒤집어 엎을테니까 각오해두라고 전한 그는 나머지 파일은 메일로 전송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츠메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안즈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살짝 젓고는 서둘러 회사로 들어가 사건 파일을 나츠메에게 전송하고 그녀의 상사에게 나츠메가 이 일을 받아들였노라고 말했다. 대신 조건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 말에 그녀의 상사는 그러려면 준비할 게 많다고 중얼거리면서 나츠메를 지켜보는 건 너에게 맡긴다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어째서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일이 전부 산 너머 산일까? 안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두통약을 물과 함께 삼키고는 책상에 턱을 대고 힘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이번에 나츠메에게 의뢰한 것은 어느 여학교를 지배하고있는 한 「코쿠리상」의 제령이었다. 학생들이란 호기심의 집합체라,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시험해보기 마련인데, 그것이 주변의 정보를 특별한 기간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폐쇄적인 성격의 기숙사제 여학교로 흘러들어가면서 악질적으로 변한 것이 문제였다. 한밤중에 아이들이 모여서 행하는 「코쿠리상」은 주변 영들에게는 좋은 장난거리가 되었고,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점점 음울하고 거대해져 스팟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교에 악재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급기야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발전하자 학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회사에 연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퇴마사들로는 도저히 그 코쿠리상을 이기지 못했다. 학교에 자리를 잡고 점점 힘이 커져가는 코쿠리상은 상사들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지경까지 커져, 회사의 이사진 중 한명인 히비키 와타루가 코쿠리상은 '말'에서 시작된 영이므로 언령사인 나츠메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낸 것이 지금의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안즈가 보낸 메일을 받아본 나츠메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요란한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나서 나온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자신의 통화연결음 만큼이나 화려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냐고, 서운하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나츠메는 딱 잘라서 용건만을 말했다. 형이 날 추천했느냐는 나츠메의 물음에 그는 부정의 말 한마디 없이 그렇다고 말하면서 의뢰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며, 곧 준비를 하러 가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나츠메는 무슨 준비를 하는데 형이 오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츠메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제법 장신의, 허리를 넘는 은발의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가진 사내가 쇼핑백을 들고 등장했다. 나츠메는 질색하면서 그를 내보내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다가온 그는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느냐며 눈물을 글썽인 채 나츠메의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속 거부하던 나츠메도 그의 이런 행동에는 익숙한지 어느 정도 체념을 한 채 옷을 갈아입었다. 나츠메의 머리색과 비슷한 짙은 붉은색 세일러 카라에 샛노란 리본, 그리고 하얀 셔츠와 그 아래에 자리잡은 단정한 붉은 치마는 얼핏 보면 그가 남자인지 알기도 힘들 정도로 잘 어울렸다. 나츠메를 추천했다는 그, 히비키 와타루는 나츠메의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사를 뱉으며 사진을 찍었고, 그 행위는 짜증이 난 나츠메가 핸드폰의 카메라에 부적을 붙여버리고서야 끝났다.

"아아, 나츠메 군~. 모처럼 예쁜 모습인데, 이런 건 기념으로 조금 더 남기게 해주세요!"
"이미 실컷 남겼잖아. 역시 형의 목적은 제령보다는 이쪽이었던 거지?"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네요~. 제가 나츠메 군을 추천한 건 당신의 실력을 높이 사서랍니다? 우리 귀여운 막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언령사니까요!"
"…아직도 막내 취급이야?"
"그럼요! 물론 저는 아직 회사에 남아있지만, 우리 막내는 여전히 아끼고 있답니다?"
"…흥."
"그보다 옷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전학수속은 내일 마쳐둘테니까, 모레부터 등교하면 된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사흘."
"오야? 생각보다 길군요?"
"그야 이 학교, 오우카스미레(桜花菫)잖아?"
"음? 알고 있었나요?"
"자료는 받았으니까. 어딘지 이름은 안 밝혀도 이 위치에 학교를 지은 건 거기 뿐이야. 이 땅은 귀문도 근처에 있어서 잘못 자극했다간 그 일대 주변이 전부 질척해질 걸."

질척해진다는 나츠메의 말에 와타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우카스미레 여학교는 60여년 전에 세워진 기숙사제 학교로, 교사와 기숙사는 리모델링을 했지만 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행하는 자비없는 체제와 높은 진학률로 악명과 함께 명문대를 가기 위해서라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여학생들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하지만 가혹한 체제 덕분에 자살하는 학생들도 많아 학교 뒤에는 그들을 세상에 알리지 않기 위해 묻어버렸다는 얘기를 비롯해 각종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만큼 음울한 기운이 가득찬 땅에서 영을 소환하는 행위를 했으니, 그 뒤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학교 전체에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커진 녀석을 상대하려면 쉽지 않다고 말하며 나츠메는 리본을 풀고 교복을 벗었다. 옷을 다시 갈아입는 나츠메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하던 와타루는 서류 준비나 잘 해달라는 말과 함께 강제로 등을 떠밀려 그의 집에서 쫓겨났다.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던 와타루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나츠메의 교복 사진을 오랜 친구들에게 보냈다. 물론, 후일 그는 이 일로 단단히 화난 나츠메를 풀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했다.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2.  (0) 2018.07.07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0) 2018.06.30
잿빛수채화 04.  (0) 2018.02.22
잿빛수채화 03.  (0) 2018.02.21
잿빛수채화 01.  (0) 2018.02.18
posted by 스위스무민
:
스위치/잿빛수채화 2018. 2. 18. 18:47
달그락. 도자기 접시 위에 예쁜 장식이 새겨진 철제 포크가 놓이는 소리가 났다. 달그락. 잠시 접시를 떠났던 찻잔이 누군가의 목을 축이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제법 따뜻한 색들이 가득찬 카페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흰색 브릿지가 들어간 붉은색 머리카락의 소년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떴다. 소년의 호박(琥珀)을 닮은 눈동자는 날카로운 빛으로 눈앞에 있는 소녀를 보고 있었다. 소녀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와 시선을 한 번 스친 소년은 다시 한 번 찻잔을 들어 차를 조용히 마시고는 내려놓으면서 눈을 치뜨고는 소녀를 보았다.

"그 의뢰는 분명히 한 번 거절했을텐데."
"하지만, 이제는 부탁할 사람이 나츠메 군 뿐이야!"
"말은 잘 하지. 너희들이 맡긴 골칫거리를 지금까지 내가 몇 개나 해결했다고 생각해?"
"그, 그건...."
"다시 한 번 말할게. 다른 사람을 알아봐."

나츠메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녀는 급하게 손을 뻗어서 나츠메의 손을 잡았지만, 그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갈색머리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는 그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페 안의 시선이 그와 그녀에게 쏠렸지만 나츠메는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소녀 또한 물러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우리를 좀 도와줘!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자 사람들은 저마다 나츠메에게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런 사람들을 곁눈질로 보던 나츠메는 작게 혀를 차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동시다발적으로 켜지던 카메라 화면이 갑자기 먹통이 되었다. 당황한 사람들을 둘러본 나츠메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무슨 구경이라도 났어? 각자 하던 일들이나 하지 그래?]

나츠메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돌리고는 일을 하던 사람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종업원들은 서빙을 이어갔으며,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이 아이는 보통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는 손을 뻗어 나츠메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나츠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숙여 소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는 소녀에게 손가락을 세 개 펴보인 그는 이 정도의 대가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다고 전하라고 하고는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떠나버렸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별다른 소득이 없이 돌아갔다. 이대로 가면 또 한소리 들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힘없는 걸음으로 자신을 보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소녀는 상사에게 나츠메가 세 장을 달라고 했다고 말하며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그를 보았다.

"저어...꼭 나츠메 군이어야 해요?"
"몇번이나 말했잖나. 그 정도의 실력이 아니면 죽어."
"하지만 거절당한 상대한테 밀어붙이는 것도 힘들다고요? 게다가 대가도 비싸고."
"돈은 회사 차원에서 지급한다. 너는 그가 의뢰를 받아들이게만 하면 돼."
"이번엔 세 장이라고 했다고요. 과연 사장님이 그걸 허락해줄까요?"
"흠, 확실히 그건 조금 과한 요구로군. 다른 회유책이 있으면 좋을텐데."
"이번에 잡을 요괴를 그에게 준다는 건요?"
"그게 될 리가 없잖나!"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사카사키 나츠메에게 이 이상 힘을 실어주는 게 싫은거죠?"
"조용히 해!"

정곡이었네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작게 혀를 찼다. 사람이란 어쩜 이렇게도 이기적일까. 그도 이런 회사의 성질을 알고 있기에 계속 거절하는 거겠지. 애초에 회사의 말을 들을 이유도 그에게는 없기도 하고. '회사'라는 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있던 퇴마사들을 한곳에 모아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공유하고, 혼자서 하기 힘든 일들을 함께 해결할 동업자를 찾는 것이 목적인 곳이다. 6년여 전에 퇴마사들이 종파나 주술에 관계없이 대거 살해당한 교토대사변 이후에 조금 더 원활한 대처를 하기 위해 생긴 곳인데, 회사를 세운 텐쇼인 가문이 워낙 수완이 좋아서 순식간에 대기업을 뺨치는 규모로 확장되었고, 지금은 정부에서 암암리에 의뢰를 맡기기도 하는 곳이다. 아까 소녀가 만난 사카사키 나츠메는 원래 회사에 속해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는 자기를 잘 따르던 후배 하나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이후로 그는 후배와 둘이 민간 퇴마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평범한 학교 생활을 구가하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오라고 몇 번인가 사람이 찾아간 적도 있지만, 그들은 번번이 거절을 당하기만 했다. '학교 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나츠메가 내세운 이유였지만, 소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번번이 이유를 물어보려면 말을 돌리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피하는 통에 단 한번도 그 이유를 들은 적은 없다.

"일단 나는 사장님께 보고를 하고 오지. 안즈, 너는 그동안 적절한 회유책을 생각해봐라."
"...네."

자신의 사무실을 나서서 사장실로 향하는 상사의 뒷모습을 본 안즈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러니까 그냥 잡는 녀석을 그에게 주면 가장 빠르게 끝날텐데. 어차피 나츠메가 비싼 가격을 부른 것도 정말로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것은 아닐것이다. 이번에 회사가 퇴치를 의뢰한 녀석은 사람의 정신에 들러붙어 그를 조종하는 부정의 요괴로, 그를 빙의체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요괴의 힘보다 강한 언령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회사의 언령사들은 이미 몇 번이나 실패했고, 그 요괴를 떼어내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언령사들 중에서 빙의체를 거의 아무 상처없이 떼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츠메 뿐이므로 해결을 위해 몇 번이나 그에게 접촉을 했었지만 나츠메는 얘기를 듣기도 전에 싫다고 했으며, 얘기를 듣고서도 싫다고 답했다. 회사를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닌데도 그는 이번 일을 유난히 꺼려하기는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사장실에서 돌아온 안즈의 상사는 유백색의 종이 파일을 안즈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장님이 그거라면 그도 더이상은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
"...이건?"
"이번 의뢰를 성공하면 그를 해방해준다. 의뢰비는 지급하지 않아. 사장님의 말로는 사카사키 나츠메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조건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회사에서 감금해두고 있지 않나요? 분명히 위험인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가. 너는 들어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

안즈의 의문에 상사는 그의 안경을 고쳐쓰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 차라리 독자적으로 조사할 걸. 조금 길어질 것같은 이야기의 서두에 속으로 작게 혀를 찬 안즈였지만, 이미 열린 입을 막을 수는 없기에-심지어 그랬다간 이야기가 아니라 장시간의 설교를 듣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릴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의 남자는 아오바 츠무기라는 인물로, 사카사키 나츠메가 회사에 있을때 함께 나갔던 하루카와 소라를 제외하고 상당히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인물 파일을 보던 안즈는 의문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츠무기의 프로파일을 읽었다. 아오바 츠무기의 이름 옆에는 반으로 나뉘어 오른쪽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프로파일을 정독하던 안즈를 보던 상사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눈치챘군. 아오바 츠무기는 절반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럼, 아오바 씨가 갇혀있는 이유는 혹시...."
"너도 조금은 공부를 한 모양이지? 사카사키 나츠메는 아오바 츠무기의 인간으로써의 부분을 가지고 떠나버렸다."
"역시 그랬군요...."
"음, 아마도 요괴화 된 아오바 츠무기가 이 회사를 부숴버리기라도 바랐던 모양이지."
"...어째서...그런 짓을...?"
"그건 알 수 없다. 난리 끝에 아오바 츠무기를 제압하긴 했지만 요괴가 된 그는 시종일관 사카사키 만을 찾을 뿐, 대답도 안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대로 죽게 내버려둬도 됐지만, 그의 근간이 되는 요괴는 제법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죽지도 않을테니 언젠가 쓰게 하기 위해 회사의 지하 깊은 곳에 봉인을 해두었다. 그 뒤로 사카사키는 몇 번인가 이 요괴를 내놓으라고 쳐들어 온 적도 있었다."

상사의 말에 안즈는 나츠메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럼 그 날도 쳐들어왔던 거구나. 그 날은 제법 햇빛이 따스한 봄날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수를 받던 도중에 귀가 아플 정도의 경보음이 들렸다. 그리고 곧 요란한 소리가 로비에서 들려왔다. 호기심에 같이 연수를 받던 동기들과 함께 대피를 하면서도 흘끗 쳐다보았던 로비에서는 척 봐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와 금발의 그림자가 화려한 선을 남기며 춤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는 안전셔터가 내려와 그 이상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나중에 경보음이 멎고 나간 로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날의 일을 떠올린 안즈는 파일을 손에 들고는 뭔가 결심을 한 듯, 나츠메를 만나러 가기 전에 아오바 츠무기를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상사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고 한참을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빠르든 늦든 보게 되겠지. 허락한다. 출입증은 내가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스위치 > 잿빛수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는 마을 02.  (0) 2018.07.07
잿빛수채화 -끝나지 않는 마을- 01  (0) 2018.06.30
잿빛수채화 04.  (0) 2018.02.22
잿빛수채화 03.  (0) 2018.02.21
잿빛수채화 02.  (0) 2018.02.20
posted by 스위스무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