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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14 :: 망가진 모형정원 - 언제나와 같은.

망가진 모형정원

오기인 - 초전자포 AU

* 비정기적으로 쓰고 싶은 내용들만 업로드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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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언제나와 같은 오후였다. 슈는 제 옆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나츠메를 보다가 익숙한 듯 그가 기대지 않은 팔을 들어 찻잔에 홍차를 따라냈다. 따뜻한 김과 함께 조금 달콤한 향이 공기 중으로 퍼졌다. 조금 전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눈 앞에 있는 잔해들이 그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꼬맹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향을 즐기다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식지 않은 물이 향을 머금은 채 입안을 맴돌다 몸을 데웠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하나 둘씩,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으른 녀석들 같으니. 가볍게 혀를 찬 슈는 먼지가 가라앉은 잔해들과 바닥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제 친구들을 보았다.

"완전히 엉망이네. 나츠메가 한 짓이야?"
"…뻔히 알면서 묻는 것도 악취미다. 레이."
"뭐, 네가 연락을 했을 때부터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아하하, 화려하게도 저질렀네요, 우리 막내는☆ 이번에도 비슷한 일인가요?"
"그래.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야. 어린 나이에 레벨5의 경지에 올랐으니 주변에서 시기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어리석은 범인들은 이 꼬맹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니까 말이야."
"우후후,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처음에 레이가 나츠메를 「제압」했던 날이 떠오르네요…♪"
"제압이라니, 듣기 나쁘네. 그냥 소통할 계기를 만든 것 뿐이잖아?"
"그래도 레이의 행동은 꽤 강압적이었으니까요! 그땐 정말로 놀랐습니다, 레이가 저 작은 아이를 죽여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요!"
"어이, 어이. 도대체 너희들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으음…. 역시 「그거」네요."
"그거라니. 카나타, 좀 더 확실하게 말해봐."

제법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채근하는 레이를 보던 카나타는 눈을 접어 웃으며 확실한 단어를 말했다. 「무법자」요. 카나타의 말에 레이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리 그래도 애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 날은 죽을 만큼 짜증이 나긴 했다고 덧붙이면서 레이는 적당히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슈가 따라주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 슈의 어깨에 기대서 잠들어 있는 아이, 사카사키 나츠메는 학원도시의 공식 기록상 최연소로 레벨 5의 경지에 오른 녀석이다. 다만, 그 능력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의 부모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본인을 포함한 다섯 명 정도였다. 지금은 그래도 꽤 많이 누그러져있지만, 처음에 그를 봤을 때는 정신이 망가져버린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데다 두세 번 질문을 해야 겨우 상대를 인식할 뿐, 질문에 대한 답도 주지 않았으니까. 목 끝까지 올라오는 폴라티는 제 팔보다도 길어서 손가락이나 겨우 보일까말까 할 정도였고, 구석에서 조용히 천장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잠을 자거나 하는 게 전부였다. 연구원들은 그를 잘 돌봐주라고 했지만, 다가오지도 않는 녀석을 돌봐줄 정도의 아량은 그들에게 없었다.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열대여섯살 소년들의 인내심은 어른들의 무관심보다도 짧았다.

그 일은, 연구원들이 없는 사이에 일어났다. 이미 몇 년이고 연구실에 드나들면서 유난히 사람이 적은 날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고, 연구소 내부도 잘 알고 있었던 레이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일을 실행했다. 구석에 앉아있는 꼬마녀석은 뭘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지, 조금 힘을 주니까 그대로 딸려왔다. 그래도 저항의 의지는 있었는지 제 딴에는 발버둥을 쳤지만, 음식조차 먹는 걸 본 적이 없는 녀석의 힘은 평소에도 사고를 쳐서 조심하라고 주의를 받는 레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츠메를 전투력 실험실까지 강제로 데리고 가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거 놔!!! 뭘 하고 싶은 거야? 날 내버려 둬!]

제대로 끝소리가 닫히지 않은 문장은 묘하게 듣기에 거슬렸다. 딱히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 나이가 되도록 똑바로 말하는 것 조차 못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츠메는 계속 발버둥쳤다. 나츠메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건 같은 레벨 5인 다른 세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레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싫어, 제발, 그냥 날 혼자 둬, 나는 혼자 있으면 된다고. 아무것도 얽히고 싶지 않아. 눈물이 맺힌 소년의 목소리는 곧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보아왔던 것처럼 반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레이는 그를 끌고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흔들어보았다.

[어이, 꼬맹이. 야, 사카사키. 괜찮냐?]
[……. …….]
[야, 야. 여기 좀 봐봐.]
[레이…. 설마 그 애를 「죽인」건 아니죠? 아무리 레이가 학원도시의 「1위」라고는 해도, 정당한 이유 없는 「살인」은 누구도 눈감아 줄 수 없어요.]
[아, 무슨 소릴 하는거야. 억지로 좀 끌고 왔다고 죽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이는 카나타의 말이 내심 걸려 혀라도 깨문 건 아닐까, 하고 턱을 잡아서 입을 벌려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싶어 나츠메를 이리저리 살피던 레이의 손은 옷 위로 미묘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을 그제야 깨달았다. 여태껏 그를 끌고 오는 것에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감촉이었다. 손을 잡고 반응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나츠메의 소매를 걷어 올리자, 손목에 차고 있는 아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게 평범한 아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부모가 연구원이라고 했었지. 한숨을 내쉰 레이는 전투력 실험실의 문을 열고는 강제로 그의 아대를 벗겨냈다. 찌익, 벨크로가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흐르기 시작했고, 나츠메는 곧 욱신거리는 팔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레이!!!]
[이게 문제였구만. 됐어. 이건 일단 보관해두고. 지금부터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간섭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강제적이지 않나!!!]
[뭐? 난 이렇게 죽은 눈을 하고 있는 놈은 못 돌본단 말이야. 대충 사정은 알 것 같으니까, 담판이 지어질 때까지 너희들은 들어오지 마. 사람도 부르지 마. 알겠어?]

학원도시의 초능력은 분명히 뇌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능력이 발현하는 시기는 개인마다 전부 다르지만, 능력을 높이는 데에는 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어차피 명령의 중추기관이기도 하고, 계산식은 전부 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어린 나이에 레벨 5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츠메의 부모는 연구원이었으니 그의 뇌에 무슨 짓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악취미다. 자기 자식을 실험대상으로 만들다니. 인간의 욕심이란 이렇게 끔찍한 것이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는 실험실의 바닥에 나츠메를 패대기쳤다. 짧은 신음이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왜 날 그냥 두지 않아…?]
[난 너 같은 꼬맹이가 아주 싫거든. 주변을 그렇게 다 차단하고 살면 재미있냐?]
[…….]
[흐응, 이제야 좀 재미있는 눈이 됐네. 덤벼 봐.]

피가 흐르는 팔을 붙잡은 채 자신을 노려보는 나츠메를 보던 레이는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나츠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피가 묻은 손으로 닦아내는 바람에 얼굴에 피가 번진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레이는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나츠메의 모습을 보면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이런 얘기였구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레이의 주변에는 수많은 빛이 쏟아졌다. 아니, 빛이라기보다는 좀 더 강렬한 열을 내는 에너지가 그를 스쳐지나갔다.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터무니없이 얇고 예리했다. 소년의 시선은 정확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폭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제 입술을 깨물던 소년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 어떤 것도 레이에게 닿지는 못했다. 실험실의 벽이 엉망이 되고서야 공격을 멈춘 소년은 짙은 수증기와 먼지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는 레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 멀쩡할 수 있어?]
[어쭈, 형한테 하는 말버릇 좀 봐라?]
[대답해! 넌 대체 뭔데!]
[설명도 제대로 안 들었냐? 그 때도 넋놓고 있었던 모양이지? 내가 이 학원 도시에 있는 학생들의 정점. 사쿠마 레이다.]
[……. 설명이 안 되잖아.]
[하아? 건방지게. 좋아, 꼬맹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지. 그러니까, 이런 얘기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츠메의 앞에 걸어간 레이는 그의 손을 잡아 제 심장께에 손을 가져갔다. 당황한 나츠메는 저도 모르게 손 끝으로 능력을 썼다. 무의식중에 발동한 능력은 곧 튕겨져나가 다른 쪽의 벽에 흠집을 냈다. 나츠메는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눈꺼풀을 닫았다 열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를 천천히 굴리는 소년을 보던 레이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머리를 세게 들이받았고, 곧 나츠메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눈물이 맺힌 채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츠메를 보던 레이는 키득거리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좀 사람같네. 너, 어딘가 망가진 줄 알았다고?]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인마, 네가 얼마든지 폭주해도 난 죽지 않아.]
[……. 그런 것 같네.]
[어이, 겨우 그런 반응이냐?]

붙임성이 없는 소년의 말에 핀잔을 주려던 레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추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위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을 불렀다. 그 사이에 구급상자를 챙겨온 슈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나츠메의 피를 닦아내고 자잘한 상처들을 살펴준 뒤에 아대를 다시 채워주었다. 그제야 나츠메는 퍽 마음이 놓인 듯 배시시 웃으며 슈의 품으로 쓰러졌다. 레이는 곧 소개를 시켜줄 참이었는데 쓰러지면 어쩌냐고 투덜거렸지만, 곧 제 뒤통수에 날아든 카나타의 춉에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자기를 죽일 셈이냐고 버럭거리는 레이에게 카나타는 레이가 저 아이에게 한 짓에 비하면 「가벼운 벌」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물론, 그 날의 일은 나중에 연구원들에게 불려가 장장 두어 시간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확실하게 나츠메는 그들을 보기 시작했고, 그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으음…. 어라…."
"정신이 들었군. 이제 그만 일어나라, 어깨가 아프니까."
"…미안해, 슈 형…. 나, 또 저질러버렸네."
"그래도 이번엔 비교적 빨리 발견했다. 진정제는?"
"…다 떨어졌던 것 같아."
"후후, 낫쨩. 잘 잤어요?"
"…응, 카나타 형. 어라, 레이 형이랑 와타루 형까지…? 다들 웬일이야?"
"웬일은. 네가 또 저질렀다고 해서 오늘은 얼마나 부쉈나 보러 왔지."
"…우우. 상습범 같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레이, 막내를 그렇게 괴롭히는 건 좋지 못한 일이랍니다.☆ 자, 나츠메에게는 달콤~한 행복을 선물해 주도록 하지요!"

곤란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던 나츠메는 와타루가 내민 케이크 상자를 보며 눈을 빛냈다. 맨 처음으로 다섯 명이 함께 갔던 곳의 케이크를, 나츠메는 퍽 마음에 들어했다. 과일들이 달콤한 시럽을 두르고 저마다 예쁘게 뽐내며 얹어있는 모양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그런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츠메는 언제나 그걸 먹으면 행복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종종 와타루는 학교에서 그리 가깝지도 않은 곳을 일부러 걸음해서 막내를 위해 사오곤 했다. 오늘도, 그런 하루였다. 언제나처럼 소란스럽고 행복한 날. 그저 이대로 쭉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찬 날. 다섯 명은 저마다 그 행복을 마음에 새겨넣었다.


posted by 스위스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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